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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Jul 28. 2023

S#1-13. 프라이빗 조가 지난 여름에 한 일

한 달 반 논산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논산에서 지급받은 물품들 가운데 입고 있던 군복과 군화, 세면가방만 챙겨 들고 기차에 올라타고 카투사 교육대가 있는 평택으로 향했다. 드디어 '미군'의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생각에 들뜬 훈련병들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기차 안에 함께 탄 교관들은 상상 이상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 대화는커녕 말 한마디 나눌 수도 없었고, 시선을 창밖으로 두어서도 안 됐다. 얼음처럼 굳은 자세로 얼마를 달려 평택역에 내렸던 시각은 대략 새벽 두세 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텅 빈 역 광장에는 200명의 훈련병들과 몇 명의 교관. 거기서 약간의 시간을 보내며 더더욱 얼음처럼 굳어진 채 드디어 카투사 교육대로 입성했다. 브래드 피트 Brad Pitt 주연 SF 영화 <월드 워 Z World War Z(2013)>에도 등장한 캠프 험프리스 Camp Humphrey’s에 있는 카투사 교육대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영어 시험을 치렀다. 1차 시험 성적에 따라 5개 반으로 나뉘어 3주간 교육을 받고, 교육 마지막 즈음에 3차 시험을 치른 후 1등부터 200등까지 줄을 세워 의문의 상자 안에 있는 바둑알을 집었다. 그 바둑알에 적혀 있던 번호가 앞으로 2년을 보낼 자대 배치의 향방을 알려주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서 내게, 꼴등만 모여있는 반에 가서도 1등을 못하지만, 1등만 모여 있는 반에 가서도 꼴등은 안 할 거라 말씀하시더니, 과연 똘똘한 또래들 200명이 모인 중에서 1차 시험 결과로도 딱 중간반이더니, 운명의 바둑알을 뽑을 때에도 중간 즈음 차례였다.


운이 좋았던지, 내가 속한 부대는 교육대와 같은 캠프 험프리스에 있던 본부중대였고, 보직은 민간인 아저씨들이 관리하는 보급 섹션이었다.



2년을 꼬박 보낸 그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부대 안에 있던 영화관이었다. 듣자 하니 용산에 있던 영화관은 카투사도 입장료를 내야 했다지만, 평택에서는 미군들은 돈을 내지만 카투사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막사에서 걸어서 몇 분 남짓 거리에 있었던 그 영화관은 평일에는 저녁 7시, 주말이나 휴일에는 오후 두세 시와 저녁 7시, 두 번 상영을 했는데, 북미에서 갓 개봉한 신작들을 곧바로 볼 수 있었다. 요즘처럼 북미 동시 내지는 날짜 상으로 전 세계 최초 개봉이 당연시되던 때가 아니다 보니, 우리말 자막이 없다는 점만 빼면 최신 미국 영화를 보는 데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매월 말쯤이 되면, 다음 달 상영계획표가 담긴 A4 종이를 배포했는데, 거의 매일은 아니었지만 보고 싶던 신작은 거의 놓치지 않고, 심지어 주말 외박을 포기하고 주말에도 영화관을 들락거렸으니, 영화관을 총괄하시던 한국인 사장님에게 나는 돈은 내지 않지만 골수 단골쯤 되었을 것이다.



전역일이 다가오면서, 다른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정들었던 부대 내 영화관에 다시는 올 수 없다는 사실이 당장은 서운했고, 사장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간 날이었다. 2년 동안 들어갈 일이 전혀 없었던, 포스터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장님이 나를 데려가시더니, 전역 기념으로 포스터 딱 한 장을 고르라고 하셨다.


당시 기준으로 20여 년 인생을 살면서, 그때만큼 깊은 고민에 빠졌던 때가 또 있었을까. 커다란 창고 안에 보관 중이던 그 많은 포스터 가운데 단 한 장만을 골라야 하느니, 차라리 하나도 고르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내가 고른 포스터는 하이틴 슬래셔 호러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1997)>였고, 나의 선택이 의외라는 듯 사장님께서 나를 바라보셨다.



97~99년 사이 개봉한 영화들 중에 하필 저 영화 포스터를 고른 이유가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냥 2년 동안 본 영화 포스터들 중에 저 영화 포스터의 비주얼이 좋아서 고른 것일 뿐이라며,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대답했을 뿐이라며 난감해하던 어린 장금이를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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