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세대, 그것이 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세대가 20대 초중반이 되었을 때 규정된 이름이었다.
맥주는 잔에 따라 마시지 않고 병째로 마셔야 쿨했고, 윗세대의 고리타분함에 대해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말할 수 있고, 그 고리타분한 윗세대가 피땀 흘려 이룬 경제적 풍요로움을 기반으로 사회의 차세대 주역이 될 젊음의 상징이었다.
이정재, 정우성, 이병헌, 신은경, 김지호, 김원준 등 싱그러운 젊음을 앞세운 청춘스타들이 방송계와 음악계를 섭렵하며 소위 감각적인 영상미가 부각된 각종 광고까지 접수했다.
세상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을까 싶던 X세대의 당당함을 장착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갔던 군대마저 제대하게 되니,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직업이란 내가 선택하는 능동적 행위라기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선택당해야 하는 피동적 행위에 가까웠지 싶다.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와서 대학 1학년 2학기 때 복학했던 4년 선배 C 누나는 내가 봤던 사람들 중 불어를 가장 프랑스 사람처럼 잘하는 사람이었고, 같은 해 졸업 후에 C 누나는 그 어렵다는 동시통역 대학원까지 합격했고, 내가 제대하던 그해 대학원을 마치고 취업 전선까지 함께 뛰어든 참이었다.
아직 20대 중반이던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이 사회의 발전에 한몫하는 주역이 될지에 대한 깊은 고민보다는 막연하게 하고 싶던 '영화 일'이란 것이 밥벌이를 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지 잠시 고민하다가 역시 안정적인 월급쟁이로 살기 위해서는 영화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그즈음, C 누나로부터 당시 곧 개장 예정인 모 호텔에서 대대적인 채용박람회를 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까지 딱히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호텔리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얄팍한 생각만으로 삼성동을 찾았다.
면접 준비는 고사하고 호텔이라는 일터에 어떤 분야가 있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찾았던 채용박람회. 지원서를 작성하는 순간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지원 분야를 선택해야 하는데 호텔리어에 관심도 없던 내가 무엇을 골라야 했겠는가. 식음료니 객실이니 모두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았고,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도 모른 채 '비즈니스 센터'라는 명칭이 있어 보이길래 선택했다.
채용박람회였기 때문에 일단 지원서를 내면 1차 면접까지는 보게 되었는데, 면접을 어떻게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당연히 탈락이었음은 이미 면접을 보는 중에도 감지할 수 있었다. 대학도 졸업했고 군대도 다녀왔지만 치열한 취업 경쟁을 뚫고 발탁되기엔 모든 것이 어설펐으리라.
시간이 한참 흘러, 채용박람회로 어수선했던 그 호텔이 개장하고도 십수 년이 훨씬 더 지난 후, 그 호텔에서 진행했던 모 행사에 관련 홍보를 위해 그곳을 갈 일이 있었다. 나와 함께 채용박람회 때 지원서를 냈다가 채용이 된 누군가가 그 사이 꾸준히 경력을 쌓아 책임자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리어라는 직업이 내게 꼭 맞는 직업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인생에서 만나는 어떤 순간에도 대충 때우고 보자는 그런 마음으로는 될 일도 안 된다는 깨달음을 뒤늦게 가져본다. 입으로는 당당함을 외치지만, 아직 세상에 나설 제대로 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지나고 나서 후회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떠오르는 영화는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연인을 잃은 후에 찾아오는 후회막급을 그린 <이프 온리 If Only(2004)>, 인생은 치열한 싸움의 연속이라는 진리를 온몸으로 구현하는 시로이와 중학교 3학년 B반 학생들의 고군분투를 담은 <배틀로얄(バトル・ロワイアル) Battle Royale(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