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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투성이'인 지영씨들에게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단막극 '개인주의자 지영씨'

by 브라이스와 줄리

최근 두 명의 지영씨 이야기를 접했다. 한 분은 소설 속 김지영씨이고, 다른 분은 드라마 속 나지영씨다. 두 사람은 모두 아프다. 한 사람은 일상 속에서 '여성'이라서 수많은 폭력을 당했고, 다른 이는 '인격체'로서 가정에서 씻어내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남성이고, 건강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믿는 나는 이 두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두 이야기를 통해 이제껏 전혀 생각지 않은 일상 속 폭력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내가 일상적으로 뱉은 말, 생각, 우발적으로 쏟아낸 것들이 누군가에겐 상처로 차곡차곡 쌓이는 건 아닐까.


소설 '82년생 김지영' 속 김지영씨는 현재 모습만 본다면 그저 평범한 아이의 어머니이다. 작가는 우리가 버스, 거리에서 일상적으로 보게 될 30대의 어머니들의 삶을 시계열적으로 세세히 드러냈다. 김지영씨가 아내, 어머니가 되면서 자신의 이름을 잃어갈 때까지 겪은 일들을 그저 나열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김지영씨에게 폭력을 자행했다. 옛 시대에선 결코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던 일들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고 해서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이제야 엄연히 잘못을 잘못이라고 발견하게 된 것 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숱하게 자신의 것을 잃은 김지영씨는 아이를 낳을 때도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남편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데?"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 '82년생 김지영' 본문 중에서


나 역시도 나의 미래를 그릴 때 이기적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집안일은 돕는 것이고, 아이는 아내가 키워주면 내가 최대한 주말을 내서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성의 입장에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내는 것일 수 있다.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이 어쭙잖은 위로를 건넨다면, 이것 역시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서두부터 김지영씨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김지영씨가 친정엄마의 입장에서, 제3자의 시선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처음에는 뭐가 문제였나 추측하다 김지영씨의 삶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왜 그런지 온 몸으로 이해하게 됐다. 특히 김지영씨가 아이를 위해 온갖 애를 쓰다 밖에서 찰나의 여유를 즐기는 순간 누군가로부터 '맘충'이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속된 말로 '미쳐버리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쉽게 내뱉는 단어, '충'이라는 단어 마저도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부정해버리는 말이 될 수 있다. 한 인생의 역사를 안다면 절대 꺼내지 못했을 말들이다. 누군가를 쉽게 단정해버린다는 것, 무서운 일이다. 더 슬프고 무서운 건, 소설의 결말은 현실 개선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지영씨를 진료한 남성 의사는 그의 아픔에 안타까움을 표하면서도 자신의 태도는 하나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소설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바뀌지 않고, 동정만 보내는 이 시대에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한다. 남성으로서는 일견 아픈 부분이다. 그럼에도 그 아픔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고작 가책을 느끼는 정도로 아픈거지만 여성은 온몸과 마음으로 아픔을 겪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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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 속 나지영씨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에 비하면 밝다. 좀 더 개인적이고 다소 특별한 하나의 사례를 보여주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지영씨의 삶을 들여다보면 간단치 않다. 드라마 초반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날선 모습을 보이는 나지영씨 역시 온몸과 마음으로 상처를 느끼는 사람이다.


나지영씨가 타인에게 벽을 세우고 잠금장치를 몇 개씩 두게 된 원인은 그 부모와의 문제 때문이었다. 나지영씨의 어머니는 딸이 말을 인지할 8살 때부터 싸울 때마다 '저 애를 지워버렸어야 했다'는 말을 던졌다. 나지영씨는 무슨 뜻인지 모를 때부터 들은 말을 점차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 사람에 대한 신뢰를 지웠다.


김지영씨가 사람들의 말과 행동, 가치관과 시대적 분위기 등 수많은 종류의 폭력을 당했다면 나지영씨를 힘들게 한 건 반복된 '말 한 마디'였다. '저 애를 지워버려야 했다'는 말이 나지영씨를 겉으로만 강철인 척, 속으로는 연약하디 연약한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드라마는 그렇게 차갑고, 상처입은 나지영씨가 사람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을 만나 회복하게 되는 이야기다. 남자 주인공은 거꾸로 가정으로부터 두 번이나 버림받은 사람이었다.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그는 사람에게 집착한다. 정반대의 두 사람이 만나 치유를 이루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드라마처럼 치유가 뚝딱뚝딱 이뤄지진 않는다. 때론 파국적 결말이 나기도 한다. 드라마를 통해 한시적으로 위로를 얻지만 화면에서 눈을 떼는 순간, 다시 어두운 것들이 몰려오는 것이 오늘의 우리네 삶이다. 지금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수많은 김지영씨, 나지영씨가 어딘가에서 울지도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어떤 위로를 줄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냥, 어쭙잖은 위로를 하려고 다가간다기보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정도이다. 나지영씨 역시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었다. 이 움직임이 사회 전반으로 조금씩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 출처 : KBS '개인주의자 지영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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