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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May 18. 2020

8# 드디어 퇴사하는 날

5월 6일, 긴 연휴가 끝나고 오랜만에 출근을 하려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 그래도 가야지. 딱 3일. 3일만 더 버티자 내 몸뚱아! 나를 달래며 출근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사무실로 들어와서 책상에 앉았는데 할 일이 없었다. 옆자리 연구원에게 쌤, 일이 없는데요. 하니 나갈 사람에게 일을 왜 시키냐며 그냥 놀라고 한다. 오 이렇게 회사 다니면 회사 다닐 맛 나겠는데!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인수인계할 서류를 대충 정리했다. 이건 A쌤 드리고. 이건 B쌤 드리고. 음... 이건 버려도 될 것 같은데 파쇄해야지. 지잉지잉 파쇄기에 서류를 넣고 파쇄하는데 너무 많이 넣었는지 걸려버렸다. 내가 신나서 서류를 파쇄하는 걸 지켜보던 한 연구원은 많이 넣더니 그럴 줄 알았다며 요리조리 몇 번 만지더니 파쇄기를 고쳐줬다. 감사요! 하고 한참을 또 서류를 파쇄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오랜만에 출근하니 어떤 책임연구원은 놀란 표정으로 그만둔 거 아니었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어떻게 인사도 안 하고 가겠냐고. 그저 연차를 길게 쓴 것뿐이라 했다. 거의 2주 만에 출근해서인가 첫 출근할 때처럼 어색했다. 뭔가 이제 내가 속할 곳이 아니라서 그런가? 묘한 이질감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언제까지 다니냐며 물어봤고, 나는 앵무새처럼 이번 주 금요일까지예요 하고 대답했다. 그중 나와 입사 시기가 비슷했던 몇몇은 가기 전에 커피나 한번 마시자며 회사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하루에도 커피를 3잔, 4잔씩 마셨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누군가는 퇴사하는 나에게 자신의 회사 생활에 대해 하소연을 했고, 누군가는 내가 퇴사 후에 뭘 할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또 누군가는 단순히 곧 떠나는 동료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서 나와 커피를 마셨다. 저마다의 고충을 들으면서 아 역시 퇴사하길 잘했어. 난 정말 행복하다! 하는 생각도 하고, 학위과정을 마친 연구원의 조언을 들으면서 정말 내가 끝까지 공부를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그래도 다들 나의 선택을 지지한다며 응원해주었다.

특정한 사람이 힘들기도 하고 나 스스로가 한계를 많이 느껴서 퇴사를 선택했지만, 회사에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아마 나에게 학위가 있었다면 사람이 좋아서 계속 버티면서 다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퇴사할 무렵에서야 했다.



그렇게 월급루팡에 가까운 이틀을 보내고 퇴사 날이 되었다.

아아 정말 일어나기 싫어. 무거운 몸뚱이를 이끌고 회사에 도착했는데 내 자리에 귀여운 화분이 하나 있었다. 회사에서 키우는 고무나무를 거의 내가 키우다시피 하면서 난 고무나무가 좋아~ 하고 노래를 불렀었는데. 화분의 주인은 작고 귀여운 고무나무였다.

어 이거 뭐지! 누가 나한테 선물을 줬지! 하니 친하게 지내던 회사 언니가 나야. 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하며 뒤에 서있었다. 뭘 이런 걸 줬냐니까 본인은 지금부터 퇴사하는 사람마다 식물을 줄 거라면서, 잘 키우라고 했다. 고무나무 죽이기 힘들지. 잘 키울게요 고마워요! 하고 자리에 앉았다.


고무나무 이름은 무무로 지었다.

어제 우리 팀 연구원들과 책임 연구원들께는 미리 선물을 다 드렸으니, 이제 다른 팀 팀장님들께 선물을 드리러 올라갔다. 9층 연구소에 올라가서 그동안 감사했다고 쭉 인사를 드리면서 소장님께 선물을 드렸다. 본인이 준비했어야 했는데 고맙다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인사를 건네셨다. 그리고 재택근무로 서류 업무만 할 생각 없냐는 말을 하시기에 페이 맞춰주시면 생각해볼게요 하고 후다닥 도망쳤다.

5층 사업부에도 쭉 인사를 드리고, 부장님께 선물을 드렸다. 뭘 이런 걸 주냐면서 나도 선물을 하나 줘야 하는데 하고 주섬주섬 자리를 뒤지시더니 귀여운 카카오프렌즈 노트를 하나 주셨다. 이거밖에 없네요 하하. 하시면서. 앗 큰 선물이죠 감사합니다. 하고 또 후다닥 빠져나왔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 길이 얼마나 허전하던지. 겨우 1년 일했는데 마음이 이렇게 헛헛한데, 5년, 10년, 정년퇴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싱숭생숭할까. 아님 내가 첫 회사라 정을 너무 많이 준 건가.

사무실 자리로 돌아와서도 할 일이 없었다. 옆자리 연구원은 몰래 그냥 가버려! 했지만, 그래도 우리 팀 팀장 격인 책임 연구원에게는 인사하고 가야지.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5시가 되었다.

대회의실에 팀원들 모두 모여서 퇴사 축하 케이크의 촛불을 불고, 안녕 모두들. 저는 먼저 떠납니다 하고 짐을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화분 선물도 받고 미처 챙기지 못한 짐들이 있어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가기로 했다. 짐이 많아서 다른 연구원이 1층까지 짐을 들어줬는데, 본인이 많은 퇴사자를 봤지만 1층까지 퇴사 배웅은 처음 한다며 웃었다. 그렇게 택시를 잡고 집으로 향하는 길. 뭐가 그리 피곤했는지 택시 타고 오는 30분 내내 죽은 듯이 잤다. 처음 하는 퇴사라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걸까. 집에 와서는 짐 정리할 새도 없이 씻고 침대로 향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회사의 마지막 출근을 마무리했다.



어떤 일이든 마무리를 잘 지어야 한다는데. 그래도 첫 퇴사를 마음에 들게 잘 마무리 지은 것 같다.


하지만 아직 회사에서 퇴직신고와 임금, 퇴직금 정산을 해주지 않아서 퇴사 일기는 끝나지 않았다.

언제쯤 끝이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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