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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Apr 02. 2020

2# 돈없는 노예의 길로

대학원 컨텍

처음엔 주위에서 BI(Bioinformatics)를 많이 권했다.

한국에 전공자가 적어서 일자리 구하기도 쉽고, 경력 쌓고 해외로 나가면 국내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나야 뭐 드라이 랩(Dry lab)을 경험해본 적 없으니.. 그렇구나 끄덕끄덕했다.

전망은 좋지만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는 분야였다. 나는 흥미가 생기지 않는 분야는 거의 손을 대지 않는데, 그래서 학부시절 성적증명서에는 A+만큼 C+도 많았다. 이런 내가 단지 '전망'만을 바라보고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이미 내 마음은 답을 알고 있었다.


아니!


좋아하던 Neuroscience를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대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울증에 관심이 많았기에 관련 연구를 하는 연구실로 가고 싶었지만 우울증'만' 하는 연구실은 거의 없다. 우울증은 다른 질병과 함께 수반되는 경우가 많기에 퇴행성 뇌질환, 중독 등을 연구하는 연구실에서 서브로 연구하는 것이 보통.

괜찮은 논문을 낸 교수님을 찾았고, 컨텍 메일에 내 CV(별 내용 없지만),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를 첨부해서 보냈다. 하루 만에 답장이 왔는데 시간 괜찮을 때 보자는 내용이었다. 음?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네.

팀장님께 다음 주에 반차낸다고 말씀드리고 교수님과 약속을 잡았다.


일이 쉽게 풀리는 건 내 착각이었다.

그 연구실에는 PI가 두 명이었는데, 내가 우울증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컨텍한 교수님이 아닌 다른 PI와 연결해줬다. 교수라는 직업이 원래 권위적이긴 하지만, PI 된 지 반년도 안된 사람이 거만해도 너무 거만했다. 거기다 신생 랩에 인턴과 석사 1학기 학생뿐이라니, 여기 들어갔다간 학위과정 내내 세팅만 하고 갈려나가겠구나 싶었다. 거기에 1분마다 투덜거리는(!) 석박통합과정 입학 예정인 학생.

전액 국비 장학금에 생활비는 내가 컨텍한 곳 중에 최고의 조건이었지만, 여기에서 공부하다간 학위와 건강을 맞바꿀 것 같아 다른 곳에 다시 컨텍 메일을 보냈다.


컨텍 메일을 보내고, 면접을 보고, 아 여긴 아니야 하기를 네 번쯤 했을 무렵. 일주일 동안 답장이 없던 한 교수님이 컨텍 메일에 답을 주셨다.

'만나서 갖고 있는 생각들을 들어보고 싶은데 가능한 날짜를 골라 알려주세요.'

이미 반차를 너무 많이 써서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그래 마지막이다 하는 마음으로 약속을 잡았다. 면접은 내가 해본 면접 중 최장시간이었다. 거의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본인 분야에 굉장히 자부심이 있는 분이구나. 학생에게 애정이 많으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면접이 끝나고 우리 연구실에 오면 좋겠다고 하셨고 뭐에 홀렸는지 네 좋습니다. 해버렸다. 잘해보자면서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셨다.


회사 언니에게 교수님이 책을 선물로 주셨어요. 하니

오 그 교수님 좀 좋으신데 했다.


그렇게 유난히 추운 가을이 끝날 때쯤, 대학원 컨텍을 마쳤다.

내가 뛰어나서 컨텍을 잘했다기보다는 회사 동료들이 많이 배려해주셨기에 마음에 드는 연구실을 찾을 수 있었다. 막내가 연차를 마이너스로 쓰는데, 옆 부서였으면 불가능했다.

시간은 흘러서 퇴사한 책임연구원 포지션에는 새로운 책임연구원이 오셨고, 겨울이 왔다.




https://okossik-bio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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