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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노 Jul 02. 2021

직장루틴에 작은 균열을

내 인생 첫 번째 균열은 귀촌후집짓기 두번째는 직장생활 중 코딩클래스였다


 2020년 8월30일 퇴사했습니다. 이제는 4학년이된 결군, 마흔두살이 된 아내님과 함께 시골에서 서로 돌보는 중 입니다. "나는 직업인이 되고 싶습니다"에 기록중인 글들은 직장생활만 하던 마흔네살의 개발자가 직업인으로서 홀로서기 위한 여정을 담은 글입니다. 여전히 소소하게 현재진행형이구요. 홀로서기로 큰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적당히 벌어 잘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소소합니다.  





 자기 개발 서적을 뒤적이다 보면 '우선 시작하라' 라 하는 의미의 문장들을 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때면 '말이야 쉽지, 직장다니면서 시작할 여유가 어딨어, 출근하고 야근하고 들어오면 아들 얼굴볼 시간도 없는데, 뭘 어떻게 시작하니?' 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푸념은 불평만 늘어놓는 나에 대한 자괴감과 아무것도 하지않고 생각만 늘어놓는 허탈함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직장인으로서의 나의 하루는 이렇게 반복 반복 또 반복되고 있었다. 


 '우선 시작하라'  이 말은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환경과 상황은 바꿀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환경을 바꿀 수 없는데 환경을 탓하며 시작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나의 태도를 바꾸어 썩 맘에 들지 않는 반복되는 하루에 어떻게든 작은 균열이라도 일으켜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 첫번째 균열은 귀촌 후 집짓기였다. 아파트보다는 마당있는 주택에서 젊었을때부터 살고 싶었다. 도시에서의 주택은 비싸서 엄두도 못내고 시골에서의 주택은 도시로의 출퇴근이 문제였다. 마흔을 앞두고 번아웃이 되어버린 나는 퇴사를 선택했고 도시로의 출퇴근 문제는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 귀촌 얼마 후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말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넓은 지면을 할애하여 들려드리도록 하겠다.


 슴슴했던 직장루틴에 생기를 불어넣기위해 시작했던 코딩클래스는 내 인생 두번째 작은 균열이었다. 다시 말하면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내가 귀촌한 양평에서 직업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선택지는 많지 않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코딩열풍이 불며 양평에서도 관심을 갖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양평은 해가 갈수록 젊은 층의 유입이 조금씩 늘고 있어 코딩을 가르치는 일이 지속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직장에 나가지 않고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 나는 이 일을 하기로 했다. 무 자르듯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싹둑하고 자를 수는 없었다. 코딩과외는 사이드잡으로 병행하며 직업인의 수입이 직장인 수입의 50%를 넘는 순간 그 연결고리를 싹둑 잘라 버리기로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렇게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나란 사람에 빗대어 보았을때 말이다.) 



용기내어 경기도 양평군의 맘카페에 올려 시작한 코딩클래스는(1화참조: https://brunch.co.kr/@bsjungblue/103) 순조로웠다. 학생의 집으로 매주 일요일에 방문하여 2시간씩 진행하였는데 학생이 매우 얌전했고 잘 따라와주웠다. 두 달정도 후, 옆에서 구경하던 초등 6학년인 동생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깨 넘어로 보던 동생에게 물어 보았다. "너도 같이 할래?" 이렇게 나는 두 명의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일주일 1회, 한달 4회, 12만원으로 두명의 학생을 말이다. 값싼 수업료로 나름의 호의(?)를 보이니 학생의 부모가 좋게 보았는지 양평에 있는 한 중학교에서 진행하는 직업인 특강에 강사로 서 줄 수 있냐는 제안을 해주었다. 강사료 없는 봉사였지만 코딩클래스를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무엇이든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가르치는 학생의 엄마는 이 중학교의 학부모회 회장이었다. 긴 호흡으로 작은 씨앗을 널리 퍼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속가능한 직업인으로서 그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 내가 말을 이렇게 잘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수다를 떨었다. 나는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엔지니어로서 또 개발자로서 전 세계 30여개국을 돌아다니며 겪은 이야기들, 내가 하는 일, 개발직업군에 대한 이야기, 지방대 출신의 진로 이야기, 등등 약 20명정도되는 학생 앞에서  뭔 이야기들을 그리 많이 했는지 한 시간이 지나니 말이 잘 나오지가 않았다. 강의가 끝난 후 칠판 앞으로 달려드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틈바구니에 껴서 사진도 찍고 학교에서는 소정의 상품도 제공해주었다. 




 학교 특강이 끝난 몇 일 후,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아, 저 학교 특강에서 뵜던 양평군에서 운영하는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인데요. 강사로 서 줄 수 있는지 부탁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닥치고 시작하라'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어떤 위치에 있던 어떤 환경에 있던 태도를 바꿔 시작하면  그 시작은 쉬이 사그러들지 않는다. 가느다랗게 연결되어 또 다른 시작으로 연결해 내고만다. 끊어지면 다시 이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두번째 특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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