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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노 Jul 05. 2021

퇴사 후 5개월, 루틴이 만들어지고 있다

직장인의루틴 덩어리를들어내고 직업인의 작은 루틴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2020년 8월 30일 퇴사했습니다. 이제는 4학년이 된 결군, 마흔두 살이 된 아내님과 함께 시골에서 서로 돌보는 중입니다. "나는 직업인이 되고 싶습니다"에 기록 중인 글들은 직장생활만 하던 마흔네 살의 개발자가 직업인으로서 홀로서기 위한 여정을 담은 글입니다. 여전히 소소하게 현재 진행형이고요. 홀로서기로 큰돈을 벌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적당히 벌어 잘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소소합니다.  





"아빠, 9시 30분이야!"


 늦잠을 잤다. 나야 원래 게으르고 아침잠이 많아 그렇다 쳐도 결군이 9시 30분에 일어났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겨울방학이라도 말이다. 결군 본인도 놀랐는지 '나 홀로 집에' 케빈처럼 큰 소리로 외치며 커튼을 촤악하고 걷어내었다. 캄캄했던 침실이 천지개벽이 일어난 듯 순식간에 환해진다. 시골의 아침이다. 결군도 아빠도 눈먼 자들의 세상에 온 것처럼 눈을 찡그린 채 침대 위를 헤매었다. 10시에 수학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미 늦었다. 아침으로 누룽지에 얼마 전 해놓은 돼지고기 감자 장조림과 과자같이 잘 볶아진 멸치볶음(모두 내가 만든 밑반찬!)을 후다닥 식탁에 올린 후, 아침 조깅을 나서며 팅팅 부은 얼굴로 결군에게 말했다.


"오늘 수업은 10시 반에 시작할게"


 30분 늦게 시작한다는 기분 좋은 소식에 이상야릇한 괴성을 지르더니 뜨거운 누룽지를 후후 불어가며 먹는다. 조깅을 시작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나름 기계적으로 트레이닝 바지와 점퍼와 마스크를 빠르게 챙긴다. 점퍼 입는 모습을 본 여름이는 아빠가 현관으로 나서면 튀어갈 준비를 한 채로 뚫어지게 응시한다. 준비를 마치고 현관으로 향하자 귀를 한껏 내리고 귀여움을 떠는 여름. 장독대에 담겨있는 사료를 한가득 퍼서 밥그릇에 채워주고 조깅을 시작한다.


비타민과 맥주효모가 두피에 그렇게 좋단다.


 조깅을 마치고 들어와 남은 누룽지를 먹고 비타민, 맥주효모, 양파즙을 챙겨 먹는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숱이 너무 많고 머리카락이 억세던 시절, TV에 나오던 어떤 중년부부의 식탁에 올려진 건강 보조제들을 보며 그것들만 먹어도 한 끼가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다 이유가 있는 것들이었다.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맞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커피 물이 끓기 시작한다. 준비해놓은 커피를 내리고 주방 앞 벤치에 앉으니 여름이가 얼굴을 비빈다. 커피 한 모금을 천천히 삼킨 다음, 들숨과 날숨에 집중한다. 시골의 슴슴함을 느끼는 시간이다.


 퇴사 후 5개월이 흘렀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거 아닌가?라는 아쉬움도 잠시, "아빠, 시간이 빨리 가는 건 좋은 거 아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보냈다는 거잖아"라며 이제는 너무 작아져 버린 내복을 입고 말하는 결군의 말에 위안을 삼기도 한다.

 

 5개월, 이쯤 되니 루틴이 생겨난다. 결군의 수업도, 밥 챙겨주는 일도, 코딩 클래스도, 유튜브 영상 제작도, 소소하게 앱을 관리하는 일도 어느 한쪽에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 않게 해주는 적절한 루틴 말이다.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 삼시 세끼 챙기는 부엌 때기(울 엄마가 아들 보고 부엌때기란다)로서 하루 대부분을 쓰며 나머지 일들에 버거워하던 초반과는 달리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시간관리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직장인으로서 회사만 열심히 다니면 그만이었다. 월급을 받기 위해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그만이었다. 이것은 하나밖에 없는 커다란 루틴 덩어리였다. 원하는 만큼 덜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추가할 수도 없었다. 직장인으로서의 루틴 덩어리를 들어내고 직업인으로서의 작은 루틴들을 만들어온 지 5개월이다. 별거 아닌 사소한 일상의 조각들이지만 누군가의 명령이 아닌 나의 가족과 어우러져 필요한 만큼 만들어낸 나의 루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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