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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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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노 Jul 09. 2021

연락처가 솜털처럼 가볍다

직장인의 번호는 사라지고 직업인의 번호가 채워지고 있다


2020년 8월 30일 퇴사했습니다. 이제는 4학년이 된 결군, 마흔두 살이 된 아내님과 함께 시골에서 서로 돌보는 중입니다. "나는 직업인이 되고 싶습니다"에 기록 중인 글들은 직장생활만 하던 마흔네 살의 개발자가 직업인으로서 홀로서기 위한 여정을 담은 글입니다. 여전히 소소하게 현재 진행형이고요. 홀로서기로 큰돈을 벌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적당히 벌어 잘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소소합니다.  






 전화기에 저장된 연락처들을 종종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는 한다. 회사를 통해 알게 된 동료들의 연락처가 대부분이다. 경험상 퇴사를 하고 나면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경우가 없을뿐더러 설사 연락이 오더라도 겉과 달리 속으로는 그리 반갑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집에서도 진심으로 반가울 만큼의 통화를 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난다는 건 행운이라는 생각이다. 매우 사소하지만 나의 전화가 아이폰인 이유도 한몫을 한다. 아이폰은 연락처를 찾다가 슬쩍 스치기만 해도 1초 내로 상대방에게 전화가 걸린다. 회사에서 공적으로 알게 된 동료들에게 내 번호가 부재중으로 떠있고 그 번호로 다시 전화가 걸려오는 상황은 겪고 싶지 않다. 내 연락처에서 생존해있는 사람들은 슬쩍 스쳐 잘못 걸린 전화에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감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전화기를 켜고 연락처를 열어본다. 휙 하고 아래로 내렸으나 두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스크롤이 멈춘다.  내 전화기의 연락처는 매우 가벼워졌다. 통화기록에는 조금 과장하자면 '러블리쩡쓰결맘', '우리집전화', '성여사' 나의 가족들만이 넓은 통화기록에 조촐하게 자리하고 있다. 가끔가다 모르는 번호(사실 아는 사람이지만)로 전화가 종종 걸려올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전 회사의 동료였다. oo회사에서 개발자를 구하고 있으니 가보라는 전화였다. 마흔네살의 퇴사자에게 이런 전화를 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의 삶을 느리게 걸어가고 있는 내게 이런 전화는 묘한 쾌감을 준다. 아직 직장인으로서의 생명력이 남아있다는 것과 현재의 작고 귀여운 월수입에서 생각만 있으면 든든한 월수입으로 갈아탈 수 있다는 안도감. 이전의 퇴사에서 경험했듯이 이런 믿는 구석은 직업인으로서의 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쉬이 사라지질 않는다.     



마당에서의 초저녁 하늘은 경이로울 때가 많다


 솜털처럼 가벼워진 연락처는 새로운 번호들로 매우 느리게 채워지고 있다. 십수 년간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던 연락처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부류의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신기한 경험이다. 파이썬 클래스 oo학생, 앱 oo사장님, oo도서관 강의 담당, 새로운 번호들이다. 7명으로 진행하던 코딩 클래스는 현재 2명이 되어 홀쭉해졌지만 이 끈은 놓지 않고 이어갈 생각이다. 작은 인연들이 기회를 줄 때가 있다. 2월부터 시작한 앱 개발관리는 매월 소소한 금액의 수입을 안겨주고 있다. 시간 투자 대비 효율이 나쁘지 않다. 물론 이 일은 지속가능 여부가 불투명하다. 직업인으로서 사장님과의 인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올여름방학부터 도서관에서 코딩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공공기관에서의 경력은 직업인으로서 든든한 밑거름이다. 10회 진행하는 여름방학특강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1년 동안 진행하는 정기강좌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직장인의 연락처는 줄어들고 직업인의 연락처가 그 자리를 채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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