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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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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노 Aug 18. 2021

직업인의 관성

직업인의 관성을 두려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2020년 8월 30일 퇴사했습니다. 이제는 4학년이 된 결군, 마흔두 살이 된 아내님과 함께 시골에서 서로 돌보는 중입니다. "나는 직업인이 되고 싶습니다"에 기록 중인 글들은 직장생활만 하던 마흔네 살의 개발자가 살림과 육아를 하며 직업인으로서 홀로서기 위한 여정을 담은 글입니다. 여전히 소소하게 현재 진행형이고요. 홀로서기로 큰돈을 벌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적당히 벌어 잘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소소합니다. 






 대학교 학부 때부터 월급을 받으며 일을 했으니 직장 생활 20년이라고 해도 될듯하다. 직장 생활이 그렇듯 돌이켜보면 스스로 일을 만들어내고 그 일을 통해 경제적인 무언가를 얻어내었던 적이 없었다. 항상 나의 위에는 상사가 있었고 그 상사는 나에게 일을 주었다. 그 일은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째깍째깍거리며 내 머릿속을 점령해 나갔다. 모래가 가득 찰 때쯤이 되어서야 모래시계를 뒤집어 비워낼 수 있었다.  일에 매몰되어 야근이 일상이 되고 '띠링' 하고 울리는 월급 입금 메시지에 '아 이번 달도 이렇게 갔구나'라는 공허한 메아리도 함께 울렸다. 직장인으로서의 내 일상은 이렇게 반복되며 20여 년이 흘렀다.


  마흔이 가까워지며 직장을 나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0여 년간 쌓인 직장인의 관성은 그것을 눈치챘고 그 생각들과 치열한 싸움을 시작했다. 때가 되면 울리는 달콤한 월급 입금 알림, 고정수입으로 인한 계획적인 저축, 몇 년 앞의 미래설계, 주변의 시선, 규칙적인 수입이 최고라는 엄마, 초등학생밖에 안된 아들, 시골의 삶, 경제적 활동의 제약, 이것들은 수류탄의 파편처럼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어 날카롭게 나를 찔렀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날들이 많았다. 아내와의 대화가 몇 시간이 이어지는 날들이 잦았다. 그리고 나는 결정했다. 아니 우리는 결정했다. 회사에서 동료들을 만나는 시간보다 집에서 가족을 만나는 시간들을 늘리기로 했다. 적게 벌어 잘 살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직장인의 관성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령했다.


마을 진입로, 초저녁 노을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전쟁을 끝낸 군인들도 그러할까. 승리를 선포했지만 그 후의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관성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고 몇 달이 지나도 텅 비어있는 월급통장을 볼 때면 심장이 벌렁거리고는 했다. 그렇지만 나는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첫 번째 퇴사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직장을 다니며 프리랜서 개발자를 만났고 그로부터 일을 받아 부수입을 만들었다. 회사를 가지 않는 주말이면 준비한 커리큘럼으로 코딩 클래스를 만들어 진행했다. 도메인을 사고 코딩 클래스의 과정을 홍보하는 웹 랜딩 페이지도 만들었다. 명함을 제작하여 아들과 즐겨가는 도서관분들에게 정기강좌 개설 시 연락 달라고 부탁도 했다. 당장에는 효과 없었던 이러한 사소한 행위들이 언젠가 불쑥 효과를 나타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2021년 8월 31일, 직업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적게 벌어 잘 살아보자'라는 우리 가족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여전히 적게 벌고 있다. 그리고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조금씩 수입이 늘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코딩 클래스는 4개를 운영 중이고 알고지내던 분의 소개로 독일 회사로부터 개발 일을 의뢰받아 진행 중이며(회사처럼 매몰되어 일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6-7시간 정도 투자한다) 도서관에서 여름방학 특강을 줌으로 진행 중이다. 어제는 도서관 강좌 담당 주무관으로부터 특강을 듣는 학부모들로부터 좋은 피드백이 왔다며 하반기 정기강좌를 개설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기다리는 것은 바보 같은 행동이라는 것을 첫 번째 퇴사에서 배웠다. 무엇이라도 행동하고 반응이 오면 신이 나 꽤나 영향력 있는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두 번째 퇴사에서 배우는 중이다. 무섭고 두렵기만 했던 직업인의 삶에 나도 모르게 스펀지처럼 조금씩 스며들어가고 있다.


어쩌면...

직장인의 관성을 두려워하던 내가 직업인의 관성을 두려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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