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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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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노 Jul 13. 2021

너의 사춘기, 나의 사십춘기

그의 사춘기는 마른땅에 물 스며들듯 서서히 나의 사십춘기에 스며들고 있다


2020년 8월 30일 퇴사했습니다. 이제는 4학년이 된 결군, 마흔두 살이 된 아내님과 함께 시골에서 서로 돌보는 중입니다. "나는 직업인이 되고 싶습니다"에 기록 중인 글들은 직장생활만 하던 마흔네 살의 개발자가 살림과 육아를 하며 직업인으로서 홀로서기 위한 여정을 담은 글입니다. 여전히 소소하게 현재 진행형이고요. 홀로서기로 큰돈을 벌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적당히 벌어 잘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소소합니다. 






@2021 다락에서 바라본 천정

 

 이제는 익숙해진 기계음들이 높은 천정을 타고 다락으로 흘러들어온다. 작은 다용도실의 세탁기는 건조기에 바통을 건네기 위해 열일 중이고, 작은 식기세척기는 어제의 그릇들을 요란하게 닦는다. 신세계, 신문물이었던 건조기와 식기세척기였다. 하지만, 뱉어낸 빨래를 개어주고 그릇을 알아서 넣어주는 또 다른 신세계를 꿈꾸는 게으른 40대 살림남에게 구세계, 구문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피아노 연습을 마치고(심플리 피아노 앱으로 하는 중) 책상에 앉아 어젯밤 하던 일을 시작하려는데, 결군에게 짜증 냈던 오늘 아침의 일이 마음에 걸린다.


 앱에서 선택한 영화와 드라마의 정보를 영화 DB사이트에서 가져와 보여주는 기능을 한 업체로부터 의뢰받아 며칠 야근 중이다. 유튜브 영상도 만들어야 되고, 마당에 벌려놓은 텃밭 울타리 나무도(영국식 정원 울타리 도전 중) 산에서 주워와야 하고 코딩 클래스도 준비해야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듯 개발일에 몰두하다 보면 여유를 갖는 게 좀처럼 쉽지 않다. 누구처럼 정해진 시간만 들여 탁! 개발하고 나머지 시간에 영상 만들고 텃밭 만들고 하면 좋으련만, 이건 직장에서 일하던 집에서 일하던 변하지 않는다. 난 정말 실력 있는 개발자는 아닌 거다.


 '너도 나이 들어봐'라고 얘기해주던 라떼의 그분 이야기가 종종 귓가에 맴돈다. 속으로 콧방귀 뀌며 들었던 그라떼의 이야기들이 이렇듯 소스라치게 들어맞을 때가 종종 있다. 라떼 이야기도 적당히 걸러서 들어두면 좋다. 야근으로 인해 3일을 연속으로 밤 2시가 넘어야 잘 수 있었다. 학교 가는 아들의 아침밥을 챙겨주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천근만근이다. 머릿속에 이물질이 가득 찬 듯, 뭔가 개운치 않은 기분이다. 나의 몸에 사십춘기가 찾아왔다. (마음 사십춘기는 이미 지나갔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어제저녁에 만들어놓은 새우 스파게티 소스와 얼려놓은 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가득 찬 빨래 상자는 결군의 바지로 긴 혀를 내두르며 비워달라 재촉한다. '으이차' 하고 빨래 상자를 들어 올려 세탁기로 향하는데, 발에 뭐가 걸린다. 결군의 바지와 뒤집어진 옷들이 널브러져 있다. 


@2021 시골학교 축구복이 그렇게 좋단다


 '아오, 몇 번을 말해야 하니. 벗으면 빨래 상자에 넣어달라고 임마! 그리고 뒤집어 놓지 말라고!'

(울 엄마는 나에게 3만 2천7백50번 정도 말했던 거 같다. "양말 좀 뒤집어 놓지 마!!", 세상에나 마상에나, 내가 똑같은 말을 아들에게 하고 있다니.)


 다행히도 저 말을 꾹 삼키고 속으로 말했다. 예민한 4학년 남학생, 아침부터 심기 건드리면 안 된다. 바지와 뒤집어진 옷을 발등에 올리고 축구공 띄우듯 확! 들어 올려 빨래 상자로 골인시켰다. 세탁기가 돌아간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결군: "아빠! 여기 바닥에 있던 내 바지 어디 있어요?"

아빠: "???? 세탁기 안에서 돌고 있는데? "

결군: "(짜증 섞인 목소리) 아빠~ 제가 아까 말했었잖아요~ 바지는 오늘 입고 갈 거고 속옷은 입었던 거예요!라고...."

아빠: "아빠가 몇 번 말했어. 빨래는 빨래 상자에 넣으라고. 네가 계속 바닥에 던져놓으니까, 이것도 빨래인 줄 알고 그런 거잖아~"


 크게 소리치지 않았지만, 예민하신 4학년 결군의 얼굴은 이미 굳어져버렸다. 

꿈틀거리는 작은 입술사이로 작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내가 말했었잖아요.."


 아차. 전자레인지에 밥을 넣으려던 때, 결군이 큰 소리로 "아빠 바지는 빨지 말아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 미안, 깜빡했네."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창문으로 쨍하게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결군의 얼굴은 이미 어둠으로 가득했다. 학교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화해를 시도했지만 '뚱'한 얼굴로 창밖만 쳐다봤다. 마을 어귀에서 할머니와 걸어내려 가는 학교 친구 루희를 차에 태웠다. 차에 탄 루희는 서늘한 공기에 큰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니 결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쏜살같이 학교로 뛰어가려 차문을 달그락 거렸지만 도어록이 걸려있어 열리지 않았다. 결군의 기분을 조금이라고 풀어주고 보내야 했다. 


아빠: "손 안 잡아주면 안 열어줄 거야."

결군: "......"

루희: "야! 그냥 한번 잡아줘! 빨리 가야지!"


 결군은 루희의 눈살에 영혼 없이 팔을 들어 나의 손위로 척! 하니 얹었다. 절반의 화해였다.

하교하는 오후 3시 50분에 데리러 갔을 때,  그의 반응은 어떠할까.


그의 사춘기는 마른땅에 물 스며들듯 서서히 나의 사십춘기에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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