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퇴사록

퇴사 후, 수염은 쑥쑥 자랐다

수염은 내가 백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매일 거칠게 자라기 시작했다.

by 우노



오빠, 면도 안하니깐 진짜 백수삘 난다


어느날 아침, 아내가 내가 건넨 한마디였다. 백수의 상징인 수염이 신경쓰였나보다.

얼마전엔 예전에 같이 일하던 부장님이 연락을 해왔다.

"나 회사 그만뒀어. 아니 사실 짤린거지."


스웨덴의 키루나, 오로라의 성지인 아비스코 국립공원으로 가는 관문이다 @2015


부장님과는 중국에서 함께 2년간 일했었다. 한국에서 같이 일하다가 내가 먼저 중국으로 건너갔고 몇년뒤 중국에서 합류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직이 와해되며 난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갓난아이를 가졌던 우리부부와는 달리 대부분의 동료분들은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 심지어 고등학생의 학부모였다. 아이들을 가진 부모들은 함부로 이사를 갈 수 없었다. 아이들의 의사를 반영해야 했고 또 그들의 교육을 생각해야만 했다. 이들은 자신의 불투명한 경제적 능력과 자식들의 교육 그리고 아내의 불안함 사이에서 힘겨운 줄다리기를 했다. 이들중 하나였던 부장님은 결국 승자가 없는 고통스런 줄다리기를 2년만에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쪽 업계에서 협상이 가능한 경력직 입사자 연령의 데드라인은 39살정도였다. 그 이상은 협상이 아닌 고개를 숙이고 통보를 받는 입장이 되어야만 재취업 가능성이 있었다. 데드라인을 훌쩍넘은 부장님은 그런 조건으로 재취업을 했고 2년도 안되 짤린것이다.


스웨덴 아비스코 국립공원에서 노르웨이 나르비크로 향하는 길 @2015


우리는 집 앞 도서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웃는 얼굴로 마주보며 인사했다. 난 웃고 있었지만 사실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두운 얼굴에 뭉개진 종이재처럼 하얗고 거무튀튀한 수염들이 덤불처럼 뒤덮고 있었다. 두 백수가 평일날 도서관에 앉아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볼만 했을것이다. 어색함이 하늘을 찔렀다. 웃으며 한마디 건넸다.


"부장님, 면도 좀 하세요! 진짜 레알 백수처럼 보이잖아요! 옷도 좀 밝은 거 입고! 어깨도 좀 펴고!"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부장님은 자신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지 넌 알수없다며 있는그대로 모든걸 토해내고 있었다. 어딘가에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털어놓을 수 없었던 그간의 갑갑함까지 모두 토해내고 있었다. 방학중인 사춘기 아이들과 함께 평일 집에 있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라고, 아내는 남들만큼 하는 전형적인 가장을 원하고, 싸움의 불씨를 피우지 않기 위해 도서관에 가고, 그래서 어떻게든 재취업을 하려하는데 나이가 발목을 잡는다고 했다. 이 가시밭길을 아내와 같이 함께 하지 못하고 등떠밀려 혼자 가는 길이라서 더 힘들다고 했다.


스웨덴 아비스코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길 @2015


부장님에게 덤불처럼 얼굴 전체를 덮고있는 수염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자신이 결정해서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가족이 경제적으로 조금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그저 열심히 일했을 뿐이었다. 경제적 활동을 가로막는 나이라는 커다란 벽이 멀지 않은 곳에 떡 버티고 있는데 아무런 무기도 준비하지 못했다. 벽은 가까워 오는데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가족이 이제는 힘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데 그러지 못한것 같았다. 무기없이 두터운 장벽으로 무거운 한걸음을 힘겹게 옮기고 있다는 걸 가족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회사를 다니고 있지 않는, 비슷한 듯, 그렇지 않은 상황에 처한 우리 둘 사이엔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난 장난스레 웃으며 이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면도는 하세요! 머리도 좀 깔끔하게 깎고!"


스웨덴의 키루나, 이곳은 오로라를 볼수 있는 북극권에 속한 마을이다 @2015


난 수염이 잘 자라지 않는 편이었다. 고등학생때, 그리고 대학생 초반에도 면도기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거의 4일에 한번 면도를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퇴사 후, 수염은 거짓말처럼 마치 영양제를 먹은 듯 매일같이 쑥쑥 자라났다. 전날 면도하고 다음날 저녁이 되면 아내의 말처럼 수염난 백수가 되어버리곤 했다.


그래도 귀찮아서 그냥 놔두곤 했는데 어느날 아침 아내가 장난스레 '수염이 많으니 진짜 백수삘난다'라고 한마디 한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부장님의 덥수룩한 수염을 보는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내도 이런 마음이 들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 이글을 쓰며 턱을 쓰다듬어본다. 어제 저녁에 면도를 했는데 벌써부터 까칠까칠하다.

이제 일어나서 면도하러 가야겠다.


난 이제 매일 면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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