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퇴사록

퇴사 후, 시간의 속도

시간에 마치 생명이 있는 듯했다.

by 우노


나는 군 시절을 철원에서 보냈다. 부대가 있던 마을 이름이 오지리였다. 이름 그대로 오지였다. 난 이곳에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고문관은 아니었지만 군대라는 시스템이 내 모든 것과 맞지 않았다. 시스템 안에서 돌아가는 모든 사소한 것들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내야 하는 일들이 지겨웠다. 사회에서 날건달이었던 간부들은 군대 내에서도 날건달이었고 이런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들 또한 괴로웠다. 군대에서의 시간들이 철로 앞,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열차처럼 그렇게 스쳐 지나가길 바랬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간다던 국방부 시계가 고장이라도 난 듯, 시간이 스쳐 지나가기는커녕, 군대 내에서의 1초 1초를 모두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더디게 흘러갔다. 나에게 군대 시절의 시간은 이렇듯 느리게, 매우 느리게 흘러갔다.


독일 린다우 @2015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당시, 대기업을 다니진 않았지만 난 내가 원하는 재미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는 그런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매출의 100%가 수출이었던 회사여서 신입 3개월 차에 해외출장도 원 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맡는 일마다 재미가 나서 회사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1초, 하루를 느끼기는커녕 한 달의 흐름도 느끼기 힘들 정도로 사회생활 시작의 시간은 빠르게 매우 빠르게 흘러갔다.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는 의식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독일 린다우 @2015


직장생활에 노련함이 점점 짙어질 즈음에도, 여전히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지만 난 그걸 원하지 않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어버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상한 건 뭔가 뿌듯하다거나 채워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 인생이 소모되어지고 있다는 감정이 커지기 시작했다. 난 그 감정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은 오직 직장 내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 욕구 그리고 월급만을 향해 있었다. 그 시간 속에 예전에 그토록 내가 좋아했던 일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더불어 아내와 아들 또한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건 나는 원치 않았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고 결국 난 퇴사를 결정했다.


독일 린다우 @2015


퇴사 후 6개월이 지났다. 두 달의 여행도 빠르게 지나갔고 넉 달의 쉼의 시간 또한 매우 빠르게 지나갔다. 무언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자니 잡아두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조바심이 잡초처럼 무성해지고 생각이 많아졌다. 퇴사에 대한 후회가 번개처럼 번뜩이다가도 지금의 번뇌가 내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모든 이유들보다 더한 것인지를 떠올리기도 했다. 당장 눈 앞의 불안으로 인해 퇴사 전에 겪었던 감정의 소용돌이들을 잠시 잊고 있었구나라며 깨닫고는 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시간이 더욱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독일 린다우 @2015


시간에 마치 생명이 있는 듯했다. 내가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고 조정하려 하면 시간은 이를 인지하고 그에 역행하려 했다. 마치 그 흐름을 의식하지 말고 그대로 물 흐르듯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라고 내게 말해주려는 것 같았다.


'네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흐르고 있어. 네가 처한 상황에 따라 네 마음이 나를 억지로 조정하려 하는 것이야. 그냥 지켜봐줘. '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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