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움, 절실한, 단순함을 가장한 반항
출장 길에 오를 때면 비행기 안 그리고 적막한 호텔 안에서 홀로 읽을 책을 몇 권 챙겨가곤 했다. 취미, 삶, 과학의 테마가 주를 이루었다. 지금 하는 한가지 일이 내게는 더 이상 재미가 없었고 절반이나 남은 인생을 이것으로 채울 수 없을 거란 확신이 서곤 했다. 머릿속 한편에 항상 둥지를 틀고 힘들 때면 쿡쿡 찔러대던 그것들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건강한 힘을 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취미를 찾아보고 경험해 본 다음 내게 맞는 무언가를 찾아보려 노력했다. 지금의 삶이 내가 원하는 삶인가를 현자의 말을 통해 깊게 생각해보고 싶었다. 사소한 걱정들도 머릿속이 복잡할 땐 우주만큼 좋은 처방은 없었기에 한때 과학 서적에 푹 빠지기도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다는 나의 잠재의식이 때가 되면 덮쳐올 퇴사의 충격파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빠른 속도로 직진만 해오다 옆으로 살짝 틀어버리면 적지 않은 관성이 작용한다. 관성을 이겨내고 샛길로 들어서면 그곳엔 더 많은 길이 있지만 난 선택의 여지가 없던 하나의 길에서 속도만 냈다. 들어선 샛길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서둘러 갈 필요는 없는데 쉽지 않다. 걸음이 빨라진다. 십수 년 관성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생각들이 캄캄하고 조용한 밤이면 엄습해왔다. 그래서 매일매일 마음을 다 잡는다. 이쪽 길로 들어서 보기도 하고 저쪽 길로 들어서 보기도 한다. 끝까지 가보지도 않은 채 지레 겁먹고 뒤돌아 서기도 한다. '나의 생각이, 나의 결정이, 나의 실천이 이리도 가볍구나' 라고 자책하기도 한다. '조바심 내지 않아도 돼.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아내 덕에 다시금 용기를 얻는다.
대책 없는 퇴사란 말을 종종 쓴다. 어떤 이는 무책임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용감하다고 말한다. 가장이면서 대책 없는 퇴사는 죄악이라 말하기도 하고 회사를 다니며 대책을 세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대책없는'이라는 단어에 가벼움이 묻어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단어엔 '안타까움', '절실함' 그리고 중요한 '단순함'이 담겨있기도 하다. 절실함에 이끌려 대책을 세우려 했지만 찾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 복잡한 세상살이를 향해 '대책없는 게 뭐 어때서!' 라며 어줍지 않은 단순함으로 반항 한번 해보고자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퇴사 이후 여전히 모르겠는 그 대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대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어떤 일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경험해봤지만 나의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기도 했다. 여전히 조바심 나고 두려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긴 하지만 대책 없는 결정에 후회 또한 없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난 내길을 가볼란다.
지금 당장 대책이 없어도
적당히 벌고 잘 살수 있는
나의 일을 찾기 위한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