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적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들
만약 퇴사가 TV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것처럼
꽤나 그럴듯해 보이는 인생의 2막을 보장하는 것이었다면
나에게 퇴사는 고민이 아니라 순리였을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현재 누리는 안정적인 생활이 비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나는 회사에 앉아있는 시간의 절반을 퇴사에 대해 고민하곤 했다.
십여년을 새장 속 모이만 먹다가
밖으로 나가 혼자 사냥할 생각을 하니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난 올해로 서른아홉이다.
마흔을 코 앞에 두고 나름 잘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를 감행했다.
업무에 시달려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것 같으면 마흔, 사십대란 키워드로 검색을 하곤 했었다.
울타리속 직장인들의 머릿속은 비슷했다.
마흔이라는 키워드는 이직, 퇴직, 흔들림, 허탈함, 중압감, 치열함, 세계여행 등으로 연결되었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었던 키워드, '생각'. 마흔에 생각이 많아지는 건 나뿐이 아니었다.
평균수명이 80세가 넘는 시대에 마흔이라는 나이는 절반이다.
내 이전 세대보다 평균수명이 늘어 오래 살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지금까지 살아왔던 40년이상의 시간들을 어떻게 다시 살아가야할지
고민되는게 대한민국의 현실이지 않을까.
난 단지 나머지 절반의 삶을 "의식주를 어떻게 해결하지?" 라는 고민보다는
아내와 함께 머리가 백발이 되어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사는 삶을 우선으로 하고 싶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내가 태어날때 난 울었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웃었을 것이다.
내가 죽었을때 난 웃고 주변의 사람들이 울도록 하는 삶 또한 살고 싶다.
부끄럽고 허접한 생각들로 가득찼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양적삶과 고군분투하던 이전과는 달리
질적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있는 지금이다.
서른 아홉의 퇴사,
쉽지 않은 마흔을 코 앞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