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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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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노 Aug 15. 2017

보약과 박하사탕

삶에 맛이 있고 순서가 있다면 쓴맛 다음에 단맛이지 않을까 싶다


어찌나 쓰던지 입에 대면 소름까지 돋았던 그 보약을 엄마는 어린 아들에게 참 많이도 다려주었었다. 
도시락에 소시지 반찬 좀 넣어달라고 그렇게 애원했건만 비싸다며 볶음김치만 줄곧 싸주시던 엄마가
그 비싼 보약은 어떤 돈으로 구해 오신 건지 꽤나 자주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어려운 살림에 아들 위해 비싼 보약을 해주신 엄마가 눈물 나게 고맙지만 그때 난 깨닫지 못했었다. 내 기억의 시선은 그저 그냥 쓰디쓴 보약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숨을 크게 한번 불고 난 다음 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얼른 입속의 코로 연결된 구멍을 막아버린 후 블랙커피 같은 새까만 보약을 꿀떡꿀떡 욱여넣었다.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혀를 쭉 내밀면 엄마는 어김없이 설탕가루 잔뜩 묻힌 새하얀 눈꽃 같은 박하사탕을 입안에 쏙 넣어주셨다. 그건 평소에 먹던 그 박하사탕의 맛이 아니었다. 쓴맛을 본 후의 단 맛은 천국이었다. 


@2015  스위스 발렌제


그랬다. 
나에게 처음으로 쓰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어릴 적의 그 보약이었다. 
평소에 먹던 단맛도 쓴맛 후에는 더욱 달다는 사실 또한 엄마가 다려준 그 쓰디쓴 보약이 알려주었다.

별 고민이 없었던 학창 시절이었다. 쓰디쓴 보약도 달달한 박하사탕도 없었다. 쓰지도 달지도 않은 무미하고 건조한 학창 시절이었다. 국어도 영어도 수학도 뭐 하나 잘 하는 것이 없어 수업시간엔 졸기만 했다. '이걸 왜 배우는 거냐'라고 혼자 불평을 해대며 적당히 그 시간들을 흘려보냈다. 평범한 대학에 들어가 평범한 직장을 들어갔다. 직장에서 힘들 때면 어린 시절 엄마가 다려 주셨던 보약처럼 얼얼할 정도의 쓴 무엇인가가 나를 자극했다면 지금 나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상상을 하곤 했다.

직장 생활의 시작은 꽤 재미있었다. 학창 시절과 마찬가지로 쓰디쓴 보약 그리고 달달한 박하사탕도 없었지만 꽤 재미는 있었다. 전 세계 3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각국의 사람들이 원하는 방송들을 볼 수 있도록 방송수신기를 개발하러 다녔다. 직장생활 이전에 비행기 타고 제주도 한번 가보지도 못했던 내가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니... 어깨가 으쓱했다. 이렇듯 달달한 박하사탕은 내 앞에 끊임없이 놓이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직장생활의 쓴맛을 모른 채 즐기던 박하사탕의 달달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015 네덜란드 네이메헨


아내와 결혼을 하고 결군이 태어났다. 
여전히 출장은 계속되었다. 몇 개월씩, 대부분 장기 출장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은 적어도 나에게는 사실이었다. 출장지에서 영상통화로 이야기하는 시간들이 늘어갔다. 아들이 커가는 모습을 내 눈에 직접 담는 것이 아닌 노트북 컴퓨터를 통해 담는 시간들이 늘어갔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안 되는 거였다.
그렇게 나는 맛이 시들다 못해 쓴맛이 베어버린 박하사탕을 '퉤!'하고 뱉어버렸다.

여행을 떠났다. 
퇴직금을 모두 들고 아내와 다섯 살 아들과 함께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유럽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69일을 지냈다. 매일 24시간 동안 아내와 다섯 살 아들을 마주했다. 졸리면 같이 자고 심심하면 같이 놀고 배고프면 같이 밥 먹고를 매일 반복했다.
무엇이 더 필요하랴. 
우리 가족은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2015 스위스 발렌제

   
시간은 똑같이 흘렀고 어김 없이 여행은 끝났다.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떠난 69일간의 유럽여행이 끝났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가 다가올수록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꼈다. 애써 감추고 아닌 척 나 스스로에게 다그쳤지만 그것은 분명한 두려움이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하는 순간 다시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해야 하는 갑갑함, 퇴사를 한 나로서는 다시 돌아갈 곳이 없다는 적막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여행 중 느꼈던 설렘, 편안함으로 가득했던 충만한 날들, 사소한 풍경 한 곳 한 곳 바라보는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여유가 계속해서 나를 이끌게 해 달라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기도했다.

나의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행 후 쓰디쓴 불안과 두려움은 수시로 엄습했고 이를 이겨내기 위한 박하사탕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블로그를 통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려 노력했다. 퇴사 후 쉼의 시간 동안 엄습해오는 불안과 두려움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의 순리처럼 찾아오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만 바꾸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곧 용기가 되었다. 퇴사 후 무엇을 할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맞불작전처럼 귀촌을 택하고 작은 땅을 매입하여 집 짓기를 감행했다. 출, 퇴근 거리에 발목 잡혀 결정하지 못했던 마당이 딸린 작은 집 짓기를 퇴사를 했으니 할 수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히 나의 주위를 맴돌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나무로 뼈대가 세워지고 나무로 지붕이 만들어지는 경이로운 목조주택의 시공과정을 보며 행복했다. 퇴사가 주는 선물이었다. 나의 모든 선택들로부터 박하사탕처럼 달달한 향내음이 풍겼다.


@2016 목골조를 올리는 모습


집을 짓는 것은 여행과도 같았다.
여행 중 돈을 잃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속아 그릇된 길을 가기도 한다. 돈을 잃었다고 속았다고 며칠을 울며 슬퍼할지 교훈으로 삼고남은 시간을 더욱 즐겁게 보낼지는 자신의 몫이다. 집을 짓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다.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땅을 칠지 그대로 밀고 나가 이겨낼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러나 모든 선택은 비용과 연결되어있었다. 
퇴사 후 수입은 전혀 없는 상태였고 대출에 대한 쓰디쓴 부담감은 나를 뒤덮고 있었다.

퇴사 후 10개월, 나는 같은 업종으로 재취업을 결정했다.
오직 대출을 갚기 위한 선택이었고 이전과는 다른 나를 느낀다. 회사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회사로부터 내가 이용당한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나도 회사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필요한 만큼, 대출을 갚기 위한 만큼만 일을 한다. 단순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나를 적지 않게 바꾸어놓았다. 평생직장의 시대가 가고 평생직업의 시대가 왔다. 직장에서 대출을 갚으며 평생직업을 갖기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2017 주방 창에서 본 풍경


목조주택이 완공되고 전원주택 생활을 한 지 9개월이 지났다. 회사에서 여전히 야근을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장기 출장은 가지 않는다. 매일매일 그림 같은 아침 풍경을 눈에 담고 회사로 향하고 밤이면 별이 쏟아지는 집으로 향한다. 행복한 감정을 블로그에 글로써 남기고 싶었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며 방송국에서도, 잡지사에서도 연락이 왔다. 믿을 수 없이 즐거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퇴사를 시작으로 쓰디쓴 순간들이 닥치면 거짓말처럼 달달한 순간들이 찾아왔다. 돌이켜보면 그 힘들었던 순간들은 쓰면 쓸수록 좋다는 보약과도 같았고 그 달달한 순간들은 어릴 적 엄마가 씁쓸한 보약을 먹은 후 입에 쏙 넣어주었던 박하사탕과도 같았다.

쓴맛을 거른 채 얻는 단맛은 조금씩 단맛이 빠지며 결국 쓴맛으로 돌아간다. 
삶에 맛이 있고 순서가 있다면 쓴맛 다음에 단맛이지 않을까 싶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삶이 다 이런 거잖아" 하며 쓰디쓴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형적이지 않은 자연은 비선형의 파동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올라가면 내려오고 내려오면 다시 올라간다. 자연에 얹혀사는 인간의 삶 또한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다. 깊은 골을 만나 깊이 내려가면 그만큼 높게 올라갈 수 있다. 높은 빌딩에서 자유 낙하하여 정면으로 바닥에 부딪히는 듯한 물리적인 충격만큼의 쓰디쓴 불행이 내게 닥치더라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그 불행만큼의 달달한 행복은 반드시 찾아온다. 

지금 당신이 행복하다면 언제 올지 모를 불행은 닥쳐올 것이고 지금 당신이 불행하다면 언제 올지 모를 행복 또한 닥쳐올 것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이 행복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나는 어릴 적 엄마가 해준 보약처럼 쓴맛이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을 안다.

그래서 두렵지 않다.

설탕가루 잔뜩 묻힌 눈꽃처럼 하얗고 달달한 박하사탕이 찾아올 것을 나는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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