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미래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었습니다
7년 전입니다. 아내는 종종 7년 전의 순간들을 손 때가 깃든 서랍 속의 오래된 편지처럼 꺼내보고는 합니다. 오래된 편지는 마치 타임슬립을 하듯 오래전 시간의 틈을 열어줍니다. 갓 돌을 넘긴 결군을 등에 붙이고 포대기로 감싸 끈을 한 바퀴 휘 두른 다음 몸에 질끈 동여맵니다. 그리고는 노을빛에 붉게 물든 탄천으로 향하는 좁은 냇가 길을 총총총 걸어갑니다. 야근이 일상이었던 남편이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아내는 언제나 그렇게 그 길을 거닐어 버스정류장에서 저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버스가 정지하고 버스 문이 열리기 직전, 버스의 내리는 문쪽 창문 캔버스에는 엄마의 얼굴과 포대기 속에서 웃고 있는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삐~'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두 얼굴이 남편과 아빠의 가슴속에 깊게 파묻힙니다. 포대기 속 웃고 있는 작은 얼굴의 젖내에 그 날의 피로는 잊은 지 오래입니다.
최근 며칠 동안 아내와 함께 다락에서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타임슬립을 통한 코믹 멜로드라마 정도로 예상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때론 불행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우리들의 평범한 삶에 대해 나지막이 이야기를 건네주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스토리텔러를 만난 듯 어느새 우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 배우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같지 않은 농익은 연기력과 작가의 스펀지 같은 흡입력 있는 문장력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알츠하이머를 앓는 엄마(김혜자)가 이제는 알아보지 못하는 아들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들려주는 장면은 하루가 지난 지금도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 가슴 따스한 울림을 주는 순간이었습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때, 밥을 올려놓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들 손을 잡고 사랑하는 남편 마중을 나가 함께 노을을 봤던 그 순간이 계속 기억에 남아"
넋 놓고 보고 있던 나에게 아내가 이야기합니다.
"나도 오빠 퇴근 시간에 맞춰 결이를 포대기에 둘러매고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던 행복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7년 전의 순간들이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돌아갑니다.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순간, 너무나도 평범했던 그 순간들을 아내는 그렇게 행복해했었구나,라고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맺힙니다. 김혜자 님이 행복했던 순간을 회상하는 아름다운 장면과 7년 전의 필름들이 뒤 섞이며 가득 맺혔던 눈물이 버티지 못하고 한 방울 흘러내립니다. 아내가 볼까 눈물들을 도로 집어넣기 위해 고개를 들고 코를 한번 훌쩍이니 "울어?"라고 눈물 맺힌 아내가 물어봅니다.
저에게 미래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에 이끌려 하루하루도 끌려다니느라 지금의 시간들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하면서도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은 무엇이 있을까, 매일 불편한 생각들에 나의 지금은 조금씩 잠식되어가는 듯했습니다. 당시에 아닌 척했지만 지금을 즐기지 못하는 남편을 바라보던 아내는 무심한 듯 자주 이런 말을 건네주고는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오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지 말자. 준비하는 것은 좋지만 지금의 순간들을 버리지는 말자. 지금을 즐기며 살아보자. 지금을 즐기지 못하면 미래도 즐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지금이 미래인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그 두려움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걱정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온전히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괜찮다, 괜찮다' 매일같이 응원해주는 아내 덕에 마음의 면역력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습니다. 어제 보았던 '눈이 부시게'의 마지막 명대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맴도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콤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많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