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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바비앙 Oct 23. 2020

커피에 묻어나는 그리움

일상의 더하기 빼기

"별일 없으면 커피 한잔 하고 가"


아이들 학교 보내는 길에 마주쳐 함께 갔다가 돌아오면서 나의 오래된 친구에게 건네는 말이다.

점심을 먹고 출근하는 나와 전업 주부인 친구는 약속 없이 만나서 커피 한잔에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점심때가 되면 또 그렇게 같이 밥을 함께 먹는다.


"반찬이 김치밖에 없어. 우리 라면 먹을래? "

"좋아~. 뭘 먹으면 어떠냐? 아무거나 먹어.”


사춘기 소녀도 아닌 우리들은 라면 하나에 조아라 손뼉 치며 신김치 하나 놓고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작은 키에 돋보기안경을 낀 J 양.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었던 학원은 학교의 연장선이었기에 처음 보는

아이에게로 시선이 갔다. 아이들에게 들은 정보로는 J양은 우리 학교가 아닌 인근의 사립  초등학교를

다니고, 학원 건물 1층에 있는 미용실 아줌마의 딸이라고 했다.

붙임성도 없어 보이고, 누군가 말을 걸어도 시큰둥한 아이. 나는 그 애가 신경 쓰였다. 늘 혼자인 게  좀

안 돼 보인다는 생각도 들었다.


중학교 1학년.

나는 우리 집에서 배정되지 않는 학교에 주소를 옮겨 입학을 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으나 걸어갈 수 있는 학교를 눈 앞에 두고 우리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차를 타고 가는 학교에 배정이 된다. 그렇기에 걸어서 학교에  다니려면 주소를 옮겨야 했다. 편법이지만 동네 몇몇 엄마들은 주소를 옮겨다 놓을 곳이 있으면 이 편법을 강행하셨다. 우리 엄마도 예외는 아니셨다.


아는 친구들 하나 없는 교실에 들어가니 J양이 맨 앞줄에 떡 하니 앉아 있었다. 내심 반가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얘한테 말 좀 붙여 둘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는 친구들은 없었지만 아는 선생님은 많았다. 하지만 이 조건이 내게 좋지 않은... 아니 아주 많이 나쁜 사실이라는 걸 알아차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의 표현을 빌리자면 ' 왕따'  나는 왕따였다.


우리 학교 선생님 딸.

잘난 것도 없으면서 모든 선생님들한테 관심받는 아이. 그것이 이유였다.

내게 말을 걸어주는 아이도, 내가 말을 걸어도 어정쩡한 반응을 보였던 아이들. 매일 우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우리 반의 또한 명의 왕따. 도무지 말을 걸어도 말이 없는  J양.  

하교 길에 J양이 저만치 앞서 가는 게 보였다.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다.


"안녕! 너 나 알지?"  고개만 끄덕인다.

"근데 넌 왜 말을 잘 안 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 아이는 내게 얼굴을 보이며 자신의 '이'를 내 보였다. 이 표면에  철사가 잔뜩

붙어있었다. 처음 본 나는 신기해서 한참을 봤다.


“이게 뭔데?”


그 아이는 교정을 하고 있었기에 발음이 부정확했고, 말할 때마다 신기한 듯 물어보는 친구들의관심이, 짓궂은 남자아이들의 놀림이 싫어서 침묵을 택해 던 것이다.사정을 알았으니 J양에게 다가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서로에게 ‘왕따’의 딱지를 떼어준 역사적인  날 이어 었다. 그게 벌써 30년도 지난 일이다.






커피, 설탕, 프림

미용실을 하셨던  친구 엄마의 일터에 가면 선반 위에 가지런하게 놓였던 3종 세트였다.

비단 친구 엄마의 일터에만 있던 3종 세트는 아니었다. 지금처럼 간편하게 봉지 하나에 다 넣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유리병 속에 담겨 있던 하얗고, 갈색빛을 띤 가루들이 부엌 찬장 한편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우리 엄마의 유일한 간식이었던 밀크커피는 한 모금만 마셔보고 싶지만 절대 먹으면 안 되는...

에덴동산의 사과처럼 몰래 먹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대상이었다.


어느 날 우리 둘이 친구 엄마의 미용실을  잠시 지키고 있으면서 궁금했던 밀크커피의 맛을 보게 되었다. 나만큼 커피 맛이 궁금했던 친구였다. 비율이 잘 맞아야 환상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밀크커피가 처음부터 호락호락 우리에게 올 리가 없었다. 단맛도 있긴 하지만 쓴 맛이 더 올라오니 한 모금 마시고 이게 뭐냐며 한바탕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우리는 철부지 어린 시절을 거쳐 흰머리와 노안을 한탄하는 중년을 함께 하며 커피 향기에 세월을 실려 보냈다.






영원히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헤어질 거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삶에는 늘 변수가 있는 법이다. 친구가 이사를 가기로 했다. 집을 내놓은 지는 한참 되었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어 이사를 포기할까를 생각하고 있던 차에

덜꺽 일이 성사되었다.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 한 채 부랴부랴 떠나보내야 했다.

친구가 떠나는 전날 밤에도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나갈 채비가 되어 있는 짐 한편에서 꺼낸 커피 두 봉지가 말없이 향기만 내보내고 있었다.


“이제 우리 일 년에 한 번 봐야 하는 거니?”


실감이 나지 않지만 우리 동네 말고 나도 딴 동네 갈 때 생겼다고 너스레를 떨며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참았다. 분명히 세상에서 제일 달달한 밀크커피인데 하나도 달지가 않았다.



친구가 이사를 간 지 벌써 두 달이 되었다. 출근길에 지나쳐 갔던 친구의 집 앞에 시선이 머물렀고,

아이들의 등교가 시작되니 오며 가며 마주칠 것만 같았다.

애들 오면 간식을 뭐 해줘야 하는지, 간밤에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와 화나게 만든 남편 흉보기,

뭐는 어디가 싸고, 어디 가면 괜찮은 게 파는지, 계절이 바뀌면 물려줄 아이들 옷가지들.....


“ 별일 없으면 커피 한잔 하고 가”


이제 다시 할 수 없는 일상의 소소한  추억의 시간.

나 혼자 마시는 커피 향기 속에 친구를 향한 그리움을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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