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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식 Apr 07. 2020

< 길 위의 명상 >

5. 자기사랑_제주올레14코스 월령선인장마을~협재해수욕장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2020년 4월)은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 인류에게 가장 가혹한 시련의 시간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정상적인 세포에 숙주 하지 않으면 독자적인 삶을 살 수도 없는, 제대로인 세포의 모양도 갖추지 못한 바이러스로 인해 현 인류 문명의 근간이 가장 넓게  가장 깊게 그리고 거의 동시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물질문명의 끝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문명의 두 축 중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시작해 물질문명의 극에 달한 아메리카대륙의 한 나라에 이르러 가장 창궐해 수많은 사람이 감염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영화에서나 상상했던 일이 지금 리얼타임으로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장소로 주목받고 있는 거대도시 뉴욕은 마치 영화 <나는 전설이다>의 촬영지인 것처럼 텅 비어 버렸고, 그곳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대형마트의 휴지를 싹쓸이해 집에 쌓아두기 바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 찬란한 문명국가의 선진정부도 그 나라의 세계 일등 시민을 자랑하던 개인도 모두 대 혼돈 한 가운데 있다.

  20대와 40대에 걸쳐 나에게 일어난 두 가지 일로 그 당시 나에게도 지금 인류가 맞고 있는 것처럼 내 삶의 방향에 대해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 버렸다. 아이의 아픔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살아가던 세상으로부터 벗어 나와 생경한 삶으로 내동댕이쳐져야 했고, 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목숨을 걸고 사랑한 이와 가슴 아픈 이별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아무것도 나의 의사와 결정과 선택이 없었던 삶에서 탈출해 나의 판단으로 실천에 옮긴 두 가지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나의 삶이 모두 끝난 듯 암울했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절망적이었다. 비록 내가 나의 의지로 감행한 결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헤아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더욱 혼돈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내안의 목소리가 인도하고 바라는 것은 나의 존재 이유와 삶의 방향이었다. 지옥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내야 하는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었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해답을 구할 수 없었던 시간에, 오로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절망의 시공간을 헤쳐 나와야 하는 과제가 부여되었다.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 isolé>. 섬 Ile의 어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섬, 혹은 <혼자뿐인> 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일 뿐인> 인간들.” 제주도로 처음 이주해 왔을 때 복잡하고 묘한 감정은 쟝 그르니에의 <섬>에서 묘사한 말처럼 딱 그랬다. 망망대해 외딴섬에, 나는 고립되었다고 느꼈다. 고립된 섬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언제 어디서 그리고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 애초의 잘못된 매듭이 지어진 그 순간으로 다시 더듬어 올라가야 했다. 

  첫 번째, 나는 나의 삶을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삶을 살지 않았다. 온순하고 행동거지가 반듯한 사람인 것과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병렬하지 못할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판단을 어른들과 주위 환경에 맡기고 무임승차하는 삶을 선택한 것, 그 느슨하고 게으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아주 어린 시절 언젠가부터 실타래가 잘못 엮였다. 돌이켜보면 내 맘 깊은 곳에 미약하나마 나의 꿈과 바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의 강권에 힘없이 그들의 자리를 내주는 커다란 실수를 범했다. 결코 그러지 말아야 하는 나의 삶의 주인 자리를 타인에게 함부로 내어준 잘못을 범했다.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내안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본래 ‘나의 자리’를 되찾아야 했다. 

  두 번째, 영원한 사랑을 꿈꾸었으나 불꽃같이 일어난 열정의 감정은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사랑이 아니었다. 영원한 사랑을 바라는 나의 바람의 방향은 틀리지 않았으나, 영원한 사랑의 구성 성분이 무엇인지 몰랐다. 매우 조심스럽고 한결같은 자세에서의 접근을 생략한 채, 온몸과 마음이 불타오르는 감정에 매몰되어 정반대의 방향에서 영원한 사랑을 찾았다고 여겼다. 같은 지점에서 정반대의 다른 곳으로 방향타를 틀어 선악과를 버리고 대신 생명나무를 찾았어야 했다. 영원한 사랑으로 만나야 할 것은 나 밖의 타인으로 존재하는 그 누군가가 아니었다. 내 밖의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 안의 나 자신 스스로였다는 걸, 그래서 사랑의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발견해야 했다. 지독한 ‘타인 사랑’이 아니라 깊고 온전한 ‘자기 사랑’이 내가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영원한 사랑의 실체였다. 남이 사는 삶을 따라가지 않고 대신 나의  자리를  찾아야 했으며, 목마른 사랑의 빈자리를 타인으로 메꾸는 대신 자기 사랑으로 스스로 충만한 평온을 얻는 것이어야 했다. 

  그렇게 나의 자리를 위해 남이 정한 자리를 버려야 했으며, 그 남이 정해준 자리에서 맺어진 관계들을 모두 정리해야 하는 고독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자기 사랑을 제대로 하지 않은 영혼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바벨탑을 쌓듯 사상누각이 될 수 있는지 뼈에 저리도록 경험해야 했기에 거듭되는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만의 기나긴 외로움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모든 것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시간들이 고난과 시련의 모습으로 주어졌다. 주변을 정리하고, 외로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자리를 찾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힘겨운 과정들을 통해 배워갔다. 제주도라는 ‘섬’에서 그 배움의 과정을 지나는 동안 침묵하던 내안의 목소리가 멀리서 어렴풋이 옅은 미소를 보내 주는듯했다.

        

***     


네 번째 길제주올레14코스 (월령선인장마을~협재해수욕장)     


  제주올레 14코스에서 비양도를 왼쪽 바다 너머로 계속 끼고 걷게 되는 월령리 선인장 마을에서 협재해수욕장에 이르는 약 5Km 바닷길 구간이 네 번째 길이다. 선인장으로 유명한 이곳 월령리는 선인장의 자생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국내 유일의 선인장 야생 군락지이다. 선인장 씨앗이 원산지인 멕시코로부터 해류를 타고 이곳으로 밀려와 자라기 시작해서 마을 사람들이 뱀이나 쥐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집 울타리인 돌담 옆에 심게 된 것이 군락지가 된 계기라고 전해진다. 6~7월엔 노란 선인장 꽃을 피우고 11월에는 열매가 보라색으로 익으며 달리는데 그 열매가 바로 ‘백년초’라 불린다. 색깔이 곱고 건강에도 좋다고 알려진 백년초로 마을 사람들을 갖가지 지역특산품들을 만들어 수익사업에 활용하는데, 제주올레 14코스의 절반을 지나 아침부터 시작한 올레 꾼이 허기가 지고 몸이 조금 무거워질 즈음에 도착하게 되는 월령리에 다다르면 보라색 백년초국수를 맛보기를 추천한다. 해풍을 전력으로 만들어내는 풍력발전소가 비취색 푸른 바다와 어울리는 바닷가 마을에서의 아름다운 점심은 제주올레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월령리를 벗어나면 왼쪽 멀리 제주도의 마지막 화산 폭발로 생겨났다는 비양도가 나타나며 네 번째 길의 종착지인 협재해수욕장까지 내내 도보여행자의 벗이 되어준다. 쪽빛 해수욕장을 품고 있는 금릉리에 이르기까지 약 2Km 정도 붉은 용암이 차가운 바다를 만나 굳어버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용암바위길을 걷게 된다. 멀리선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던 이곳을 걷는 동안 돌 틈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는 파란 갯풀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마을을 이루고 바다에선 물질을 들판에선 밭농사를 지어 가며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 온 제주 사람들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길이다. 화산이 만들어낸 돌의 섬, 거친 바람의 섬, 설문대할망이 빚어낸 여인의 섬, 여기가 제주도였다는 걸 새삼 떠올리게 된다. 무엇으로 살아갈지 앞이 캄캄하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 살아진다’라는 말로 서로를 위로하며 육지에서 내려온 무대책의 입도객을 넉넉한 인심으로 다독여주는 해녀 할망들을 만났다. 그 길 위 해녀 할망들을 숨소리가 들리는 가까이에서 만나고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어쩌면 나도 이곳에서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작은 희망이 이 돌길위에서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돌길을 헤쳐 오느라 조금 땀이 날라치면 하얀 백사장이 넓은 바다와 함께 그림처럼 갑자기 펼쳐지는데 이곳이 금릉해수욕장이다. 말 그대로 하얀 모래밭, 백사장을 지나 야자수 숲을 통과하면 연이어 협재해수욕장까지 바로 연결된다. 협재해수욕장은 몹시도 아름답지만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주위가 온통 카페와 식당들로 빼곡히 들어차 요즘은 금릉해수욕장에서 백팩을 내려놓고 걷는 여행을 마무리하는 때가 많다. 협재해수욕장 바로 옆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은 이곳 금릉해변을 잘 모르는지 여전히 예전 그대로 한산하고 여유롭다. <어린 왕자>속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비양도를 백사장 건너 푸른 바다 위로 보고 앉아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이번 구간을 마무리해도 좋겠다.      


* 찾아가는길     


출발점인 월령리 선인장 마을이나 종착점인 협재해수욕장은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2번 서부 일주 버스를 타면 된다. 1시간 정도 소요되는 제주도 정서쪽 방향에 있다.     


* 주위추천명소     

 

- 금릉석물원

평생을 정과 망치를 들고 현무암을 쪼개 제주도와 그곳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담아낸 곳이 있다. 시대의 장인이 만들어 놓은 제주도의 보물 같은 명소 한 곳이 이 구간이 지나는 금릉리에 있는데, 금릉석물원이 바로 그곳이다. 돌로 표현한 삼라만상이라고 할까. 88년의 전 생애를 돌과 함께하며 석공이 돌 속에서 발견하고 드러낸 수없이 많은 제주 돌하르방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10년 전 처음 제주올레를 걸을 때 만난 장공익명장은 이제 그가 그렇게 바라던 대자연으로 돌아가고 없지만 삶의 고단함 속에도 지나는 젊은이를 격려해준 그 넉넉한 웃음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제주도의 영혼을 대변하는 두 곳을 들라면, 동쪽에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 서쪽에 장공익명장의 금릉석물원이 있다고 주저 없이 추천한다. 꼭 들러 한참을 머물며, 삶을 바라보는 그분의 해학과 시선을 수만 번의 망치질로 조각해낸 작품들 속에서 만나보기를.     

  

- 비양도

이 구간을 걷는 내내 함께 하는 비양도는 제주도 화산섬 전체의 축소판이다. 한림항에서 운항하는 여객선을 이용해 불과 15분이면 가닿는 곳에 있다. 포구에 정박하면 섬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산책로를 따라 한 시간쯤 산책하듯 느릿느릿 걷고 나서, 비양도 봉우리로 올라가 섬 전체의 풍광을 다시 한 번 즐길 수 있다. 가파도와 차귀도가 그랬던 것처럼 섬 밖에서 또 다른 각도로 제주도 본섬을 바라보는 기쁨이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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