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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식 May 08. 2020

< 길 위의 명상 >

6. 중독_제주올레19코스 조천만세동산~해동포구



  베테랑 파일럿인 그는 알콜, 담배, 그리고 마약 중독이다. 여느 때처럼 그는 운항 일정이 잡힌 전날도 밤늦게까지 만취했고 다음날 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조종 칸에 앉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더라면 그의 오랜 경력은 그 정도의 숙취로는 어떤 상황도 자유자재로 대응할 수 있게 해 주었겠지만, 그날은 이전엔 경험하지 못한 일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갑작스레 고도 조작이 되지 않았고 항공기는 추락에 가까운 속도로 떨어졌다. 탑승객 전원의 생명이 위험했다. 깜짝 놀란 그는 탑승객들을 안심시키는 짧은 기내방송 중에도 보이지 않는 한 손으로는 오렌지주스에 술을 붓고 있었다. 비상착륙을 감행하기 위해 그는 기체를 뒤집어 배면비행으로 강하 속도를 낮추고 전무후무한 랜딩을 하면서 전원 사망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막았다. 운 좋게 탑승객의 대부분이 무사했기에 그는 위기를 넘겨낸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싱겁게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항공사고 청문회장에서 몇 가지의 형식적인 질문으로 오랜 사고 수습절차가 마무리되는 찰나에 그는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하고 만다. 영화 <플라이트 (2012)>는 이 대목에서 클라이맥스에 달하고 엔딩으로 치닫지만 그 시점 이후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영화의 대부분을 그가 처한 상황과 사고 속에서 그가 고뇌하는 지점의 압력을 가열 차게 높여가고 있었다. 티핑포인트(임계점)라고 할 만한 삶의 회피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서, 술과 담배와 마약에 중독된 인간이 어떻게 달라지기로 용기를 내고 삶을 그 이전과 어떻게 다르게 살아내는지 극적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추락사고와 함께 가장 낮은 곳으로 치닫는 그의 운명을 회피하지 않은 채, 또 다른 변명으로 도망가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그의 마지막 선택은 그가 평생 해보지 못한 가장 높은 곳으로의 ‘FLIGHT’(비행이자 동시에 탈출)이었다.  


  내안의 목소리는 그가 나를 인도한 혼돈 속에서 내가 자유로움의 방향을 찾기를 원했으며, 그러기 위해 그저 내가 나답기만을 바라는 듯 했다. 길들여진 학교수업과 대학입학과 취직과 결혼과 출산과 부와 명예의 축적과 그리고 다시 그것들의 자식에 대한 강요와 세습으로 이어지는 ‘천편일률’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가고 그 관계들을 통해 얻어진 경험과 재화를 다시 어떻게 순환시켜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지 그런 부모의 역사가 자녀의 미래의 주춧돌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을 찾고 부딪혀보는 ‘만인만색’으로의 길을 살아가길 원하며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음이 느껴졌다. 

  욕망과 경쟁 그리고 불만족의 무한반복으로 프로그램 된 도시의 중독사회 시스템에서 낳고 길러진 나는 자연과 분리되고 나다움과 자유로움이 억압된 채 그로부터 야기된 두려움과 공허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일중독과 사랑중독에 매몰되는 삶을 살아왔다. 나다움과 자유로움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러저러한 나답지 못함의 주원인인 그런 중독현상들을 반드시 걷어내야만 했다. 그 중독이란 질병들로부터 치유되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먼저 주어진 처방들이 바로 중독 시스템의 부스터로 작용했던 회사생활의 결별이었고, 의존하고 갈애하는 사랑과의 헤어짐이었다. 그런 다음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그런 이별들로 인한 깊은 상처의 치유를 통해 나다움과 자유로움의 회복을 요구한 것이었다. 

  내가 의심이 많고 수시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예민하고 감성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내안의 목소리는 내가 그를 인식했던 인식하지 못했던 상관없이 아주 오래전부터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정확히 한 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쌓이면서 누군가를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믿고 따를 수 있다는 것, 나와 달리 한결같이 흔들림 없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것에 깊은 안도와 충만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느낌으로 그의 존재를 처음에 알기 시작했고, 나아가 점점 그의 끊이지 않는 시선과 그의 동행을 확신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그 내면의 목소리가 가리키는 쪽으로 방향으로 잡고, 오랜 시간 동안 ‘나다움’이라는 자유로움의 발견과 회복을 향해 헛발질과 궤도수정의 시뮬레이션이 거듭 반복되었다. 반복이었으나 다행히도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 아닌 상승하는 궤도의 담금질과 단련의 시간이었다. 이곳 외딴섬, 생명의 땅 제주도에서, 내안의 목소리는 그런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 내 안 깊은 곳에서 충분히 그리고 완전하게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     


다섯 번째 길제주올레19코스 (조천만세동산~해동포구)     


  언제 어디를 어떻게 걸을지  작정하지 않고 길 위로 나설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이 작정하고 또 작정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타고나지 않고서야 처음부터 긴장 없이 스르르 절로 시작되는 일은 드문 법이니 결국은 그 작정들의 축적이 나은 결과로 휙 하고 생각과 함께 언제든 상관없이 아무 때나 그리고 아무 곳으로 길을 떠날 수 있게 된다.   

  

  제주도의 북쪽 올레에도 아름다운 곳이 많지만 이번엔 제주올레 19코스 출발지점인 조천 만세동산에서 함덕해수욕장과 서우봉 넘어 해동포구에 이르는 약 8Km 구간을 정했다. 제주도에서도 1919년 3.1 운동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하는 역사적인 장소에서 출발해 조천읍 신흥리 밭담 길을 돌아 나오면 함덕해수욕장에 이르기까지 내내 청록색과 비취색의 제주 북쪽 바다를 왼쪽으로 끼고 2~3시간을 하염없이 걸을 수 있다. 물론 함덕해수욕장에 이르면 제주공항과 가까워 제주도를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 방문지 1순위로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 조용히 길을 걷고자 하는 도보여행가에겐 옥에 티이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바닷길 구간은 서쪽 제주바다와는 또 다른 빠트릴 수 없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어 시간이 없는 분들이라면 제주시에서 가장 가까운 추천 구간이니만큼 잠깐이라도 짬을 내서 가보면 좋겠다. 도시의 힘겨움과 답답함이 함덕해변의 물 빛깔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 세상 어떤 악한 영혼도 이 바다에선 잠시나마 선한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치유의 시공간이 되어준다.     

  더없이 맑고 푸른 물빛에 머리와 가슴을 텅 비우고 멍한 채로 몸과 마음의 긴장을 느슨하게 하는 시간만큼 도시인들에게 간절한 휴식이 있을까. 하얀 모래밭 위에 앉은 엉덩이가 뜨겁거나 아려올 만큼 한참을 머물고 나면 서둘러 걷기 여정을 마무리하지 말고 함덕해변 동쪽 방향에 앉아 있는 봉우리 하나 위로 꼭 올라가 보자. 짧은 오름길을 걸어 그곳 서우봉에 올라서 바라보면 지나온 함덕 바다와 저 멀리 한라산으로 이어지는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 서우봉은 제주에서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아침 점심 저녁 시시때때로 장관인 모습으로 여행자를 반겨준다. 거기서 다시 서우봉 뒤로하고 발걸음을 조금 더 옮기면 그동안 가려졌던 동쪽 바닷길이 환하게 펼쳐지며 멀리 김녕 세화로 이어진다. 여기 서우봉 동쪽 아래 작고 아름다운 포구마을이 이번 구간의 목적지인 해동포구다.   

  

* 찾아가는길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조천읍 방향 201번 버스를 타고 조천 만세동산에서 내리면 되고, 개인차량을 이용할 경우 조천 만세동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해서 목적지인 해동포구에 도착하면 함덕콜택시(064-784-8288)를 불러 다시 조천 만세동산으로 이동할 수 있다.     


* 주위추천명소     


- 너븐숭이4.3기념관 & 제주4.3평화공원

해동포구에서 걸어서 10분 남짓 거리에 ‘너븐숭이4.3기념관’을 들러보자. 제주올레 10코스에서 만났던 제주 4.3의 아픈 역사를 이곳 북촌마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이 된다면 차를 타고 이동해 ‘제주4.3평화공원’에 들러 제주 4.3의 전체를 상세히 만나볼 것을 추천한다. 제주 4.3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제주도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할 수 없다. 제주도의 역사와 제주사람의 상처를 그렇게 들여다보면 우리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지나온 세월 동안의 고통들을 들여다볼 용기를 얻게 된다.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을 품고 있는 제주도에서 다시 세상을 살아갈 저마다의 길을 발견하게 되는 치유의 기회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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