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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식 Apr 01. 2020

< 길 위의 명상 >

4. 두가지 사랑법_제주올레12코스 수월봉~용수포구



  1968년 제작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것은 1978년 12살 때였다. 영화를 보고나서, 한 눈에 알아보는 사랑 그리고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랑, 나는 그런 사랑을 하리라 하고 다짐하며 영화의 인상을 가슴속에 새겨 버렸다. 주인공의 미모와 셰익스피어의 희곡으로 더없이 아름다운 영화로 기억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춘기도 아닌 어린 아이의 영혼에 어떻게 그런 생의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이 또한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그러므로 그것이 어쩌면 나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을 만난 건 23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좋아하는 청초록 바지를 입고 있었고 파마를 한 긴 머리를 찰랑이며 부끄러운 듯 인사를 건네던 그 사람을 본 순간, 열두 살 처음 줄리엣을 만난 그때로 돌아가 내 영혼에 새겨진 마음다짐을 기억해 냈다. 몸과 마음이 격정에 휘말리며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그냥 수용해 버렸다고 표현해야 할까, 그렇게 그 사람이어야 했다. 오래전 새겨버린 나의 사랑 방정식에 따라 그 사람도 즉시 함께 따라주었다. 내가 전부를 원하는 만큼 그 사람도 나의 전부를 원했으며,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삶의 모든 순서에 그 사람과의 사랑을 가장 앞자리에 두고 격랑의 시간들을 나아갔다. 그 사람도 그렇게 발걸음을 맞춰 주었기에 부모님과 주위의 반대나 걱정조차 나의 굳건한 다짐을 흔들 수 없었다. 언제나 온순하며 착하고 말 잘 듣던 모범생은 오간데 없이 자신의 영혼이 이끄는 대로 강행해 버렸다. 이때가 나의 삶을 나의 선택과 결정으로 살아본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 사람과 무조건 함께하기 위해 생애 스케줄들을 재조정하고 학교를 마치고 군대 제대와 함께 두 살 연상이었던 그 사람과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서로가 서로의 반려자로 평생을 함께할 것을 약속했고 결혼이라는 사회제도 안에 서명을 마쳤으므로 내 사랑의 방정식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에너지로 출발하였으되 죽음으로 헤어져야 하는 비극은 아니었음을 기뻐하며 영원한 사랑을 꿈꾸었다.     

  그 사람은 딸 여섯에 다섯째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나 성장기에 무엇 하나 물질적으로 부족한 게 없었지만, 그에겐 나와 똑같은 사랑 방정식을 전혀 다른 이유로 가지게 되었다. 보수적이고 부유한 집안에서 아버지를 이어 가업을 승계하기 위해서는 아들이 필요했는데 계속되는 출산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태어나던 날 아들이기를 한껏 기대를 했던 어머니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출산한 아이가 여자인 것을 확인하고는, 실망감에 강보에 아이를 둘둘 싸매어 방 한 쪽 귀퉁이로 밀쳐두었다. 이번만은 아들이었어야 했는데, 간절한 바람에도 결과는 그렇질 않아 실망하고 낙담한 어머니는 태어난 아이를 챙길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방 한쪽에 밀쳐 둔 아이가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퉁퉁 불은 젖을 물려 다시 살게 했다고 어머니는 기억했다. 그 며칠간 아이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환영받지 못한 존재의 버려짐을 경험해 버렸고 스스로의 DNA 깊숙한 자리에 결핍에 따른 빈 곳의 크기만큼 지독한 사랑을 평생에 걸쳐 갈망하게 되었으리라. 그 사람은 나와 닮은 자신의 지독한 사랑 방정식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도 오로지 나 이외에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천생연분이었고 쌍둥이같이 닮음 꼴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내가 목숨 거는 사랑을 내 사랑의 방식으로 생각한 것이 ‘은유’라면, 그 사람에겐 절박한 ‘현실’이자 ‘실제’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도 나만 원했고 또 나이기만 하면 충분했다. 내가 어디에도 가길 원하지 않았고 내가 그 사람 아닌 누구와도 함께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를 지독하게 사랑했다. 

  한 가정을 꾸리기엔 전혀 준비되지 않은 20대 중반의 청년은 모든 것을 던져 사랑해야 한다는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 사람과의 결혼은 나의 정서적 외로움과, 나의 육체적 갈망과, 나의 경제적 준비 부족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여겼기에 주저하고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운명이라고 여기고 결정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 방정식은 얼마 가지 않아 나의 은유와 그 사람의 실제를 뛰어넘었고, 두 사람 모두 영혼과 육신이 숨 막히는 지독한 사랑에 조금씩 죽어갔다. 서로가 바라던 바로 그런 사람을 만나 모든 것을 뛰어넘어 마침내 결혼까지 했는데 반대로 둘 다 죽을 것 같아했다. 혼란스러웠다. 성숙하지 못한 영혼은 모든 것이 바로 나로 인해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막연히 그 사람의 사랑 방정식인 소유와 집착에 문제가 있다고만 이유와 핑계를 대고서는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꾸었다. 하지만 도피가 현실적인 이별로 결론 나기엔 이미 두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들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영혼들이었다. 처음엔 이별을 감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통뿐이었다. 바라고 원하던 사랑으로 죽어가고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되어 나의 사랑방정식을 수정해야 했음에도, 급기야 그 사람의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라고 트집을 잡아 그 사랑의 굴레로부터 도망갈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그땐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다운 비극적 죽음이 내 삶에선 전혀 다른 죽음처럼 느껴졌다.   

  또 한편, 그녀는 그 사람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인상은 무표정했으며 조금 쌀쌀하고 냉정하게 보이기조차 했다. 겸손하고 예절 바른 태도였지만 왠지 침울해 보였고 주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애써 관심을 갖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 사람과의 결혼생활을 정리할 마땅한 구실을 찾지 못했던 나는 가장으로서 호구지책의 책임을 이유로 시작한 회사생활이 한편으로는 숨 막히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출구이기도 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그저 일로만 알고 지내던 그녀가 내게 또 다른 사랑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전혀 엉뚱하고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우연히 그녀가 자신의 월급에서 일정 금액을 매달 북한 기아어린이 돕기 성금으로 보내는 걸 확인한 순간에 찾아왔다. 무심하고 딱딱하고 냉정해 보여 아무런 관심조차 가지 않던 그녀가 그런 따뜻한 마음을 실천하고 있다는 게 내게는 뜻밖의 일이었다. 뭐 그리 특별한 일이냐고 넘겨 버릴 수도 있겠지만, 당시 나는 좋은 회사 취직하고 돈 많이 벌고 큰 아파트를 장만하고 성공하는 것이 삶의 스펙트럼의 전부라고 여겼기에, 나보다 어린 사람이 어떻게 단순한 불우이웃도 아닌 북쪽의 기아 어린이들을 배려하는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걸 꾸준히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하는지 충격이 적지 않았다. 세상에 나는 전혀 생각지 못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그 얼떨떨하고 멍한 충격이 내게 그전까지의 사랑 방정식과는 전혀 다른 사랑 방정식이 가능함을 알게 해 주었다. 그 이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했다. 그녀의 생각 하나하나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과 과정에 통째로 호기심이 일었으며 그녀가 자라온 환경과 삶의 매듭들이 모두 알고 싶었다. 무심하게 아무런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던 그녀가 보인 작은 나눔의 모습으로 보인 사랑으로 전혀 다른 사랑이 존재하고 또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좀 더 알고 싶고 가까이하고 싶다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이 피워 올랐다. 지독한 사랑의 공식으로 서로를 죽이는 사랑이 아니라 나누는 사랑으로 서로를 기쁘게 하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이상 더 이상 지난날의 사랑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녀도 비취색을 좋아했으며, 시와 음악을 좋아했고,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녀를 통해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를 알게 되었고, 그의 후기 예언시를 함께 읽으며 신과 영혼의 존재를 배웠다. 신성과 타락을 분별했으며, 존귀한 사랑과 그 표현법들을 함께 익혀갔다. 그녀는 그렇게 전혀 다른 사랑 방정식이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로버트 존슨은 <희열>에서 “엑스터시는 엑스 스타시스 (ex stasis), 즉 자기 바깥에 나가 선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인간이 육체의 본능으로부터 벗어나 신성과의 결합을 통해 느끼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황홀감을 엑스터시라고 정의했다. 중독으로 마비되어 바깥에 놓여 있는 무엇을 강렬하게 갈망하며 그로부터 얻는 짜릿함이 ‘엑스터시’의 본래 의미가 아니었다. 내 삶을 결정지었던 두 가지 사랑 방정식을 경험케 했던 두 사람을 모두 20대에 만났고, 얼마이지 않아 결국엔 모두 떠나보내야 했다. 공존할 수도 어느 누구 하나도 선택하지 못하는 깊은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자연스레 이별의 시간들이 순서대로 들이닥쳤다. 그때로부터 20여 년이 훌쩍 지나 이제 오십 중반에 들어서고 폭풍 같은 시간을 겨우 물끄러미 다시 되돌아보게 될 수 있게 되어서야,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내 영혼의 지도에 새겨져 있었을 삶의 노정과 방향이 어렴풋이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왜곡되지 않은 사랑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 사랑의 원형을 삶에서 생활로 구현하는 것, 신의 본성과 동물의 본능을 동시에 가진 인간에게서 타락(신성으로부터의 분리, 그 자체)을 이겨내고 신성으로 머리와 가슴과 몸뚱이의 방향을 돌리는 것, 나아가 신성을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가 그 분리를 마침내 극복해 갈 수 있다(신성과의 합일)는 것을 스스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간절히 찾아 헤매 다녀야 했는지 형체가 보였다. 바로 내 안의 신성인 사랑의 원형을 만나 합일의 황홀감인 본래 의미의 진정한 ‘엑스터시’를 되찾는 것이었다. 

     

***     


세 번째 길제주올레12코스 (수월봉~용수포구)     

  

  제주올레 12코스의 후반부 수월봉~용수포구까지 약 5km 구간이 세 번째 길이다. 이 곳은 그 길의 풍광도 풍광이지만 무엇보다 제주올레 12코스가 끝나는 지점에 나타나 몇 시간을 걸어온 올레꾼들을 맞이하는 김대건신부의 제주표착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엔 있고 제주올레엔 없는 것을 꼽으라면 그중에 하나가 마을마다 만나는 성당일 텐데 이곳만큼은 그런 아쉬움을 달래줄 뿐만 아니라, 야고보 성인의 복음 전파를 위한 위대한 여정에 견주어 절대 모자라지 않은 한국 성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천주교에 대한 지독한 박해 중에 김대건신부는 몰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사제서품을 받고 돌아오다 그만 풍랑을 만나 제주도 서쪽 작은 포구에 표착했다. 표착 이후 이곳에서 한국 신부의 미사가 처음으로 올려졌고, 김대건신부는 육지로 올라가 1년 남짓 왕성한 포교활동을 벌이다 붙잡혀 1846년 불과 25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제주올레 12코스를 마무리하고 누구든 종교와 상관없이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깊은 평안과 안식을 느낄 수 있다. 소박한 성당의 내부와 김대건신부의 표착 이야기를 표현한 화려하지 않은 성당 내벽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순서대로 바라보며, 그렇게 잠시 머무는 동안 자연스레 질문을 던지게 된다. 25세의 꽃 같은 나이에 초연히 목숨을 걸고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목숨을 걸 수 있는 길, 그에게는 있었고 나에게는 아직 뚜렷이 보이지 않는 그 길을 김대건신부는 과연 어떻게 만날 수 있었는지 묻고 또 묻는다. 운명처럼 타고나면서부터 벼락처럼 떨어져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흙속에 파묻혀 언제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다이아몬드 원석처럼 깊게 숨겨져 있어 찾고 또 찾아야 하는가. 내가 오래전 운명처럼 경험했던 인간의 갈애하는 사랑은 김대건신부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어리석은 영혼은 스스로 모두 겪지 않으면 모르는 법인가 보다. 제주올레12코스를 걷고 성당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의 지독한 사랑방정식으로 인해 두 사람 모두에게 안겨주었던 아픔과 고통을 떠올리며 뒤늦은 참회의 고해성사를 드리게 된다.          


  제주도 서쪽에서 낙조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한 수월봉에 올라서면 바다 쪽으로는 차귀도 앞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반대쪽 한라산으로는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와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리가 경계를 맞대고 육지의 호남평야처럼 너른 들판을 품고 있다. 수월봉 앞바다 한가운데에서 오래전 화산 폭발이 일어났고 침식과 풍화로 지금은 수월봉 아래 화산쇄설층만 남아 있다. 고산리 들판은 화산 폭발 당시 공중으로 분산된 화산재들이 섬 방향 쪽으로 날아와 켜켜이 쌓여 지금의 평야지대를 이룬 곳이다. 산방산, 용머리해안과 함께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된 수월봉 아래 화산쇄설층 단면을 오른쪽으로 끼고 왼쪽으로 차귀도를 바라보며 해안 산책길을 걷다 보면 지질트레킹의 명소로 전 세계 지질학자들의 이곳에서 왜 탄성을 자아내는지 그 이유를 실감하게 된다. 수월봉 입구에 있는 안내소에 들러 마을해설사에게 요청하면 수월봉과 고산리 일대의 생성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데 꼭 들어보길 추천하다. 알고 보며 걷는 것과 좀 특이한 곳이라며 그냥 대충 지나가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해안 산책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이내 차귀도행 여객선을 탈 수 있는 작은 포구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포구 뒤편 절벽 위로 다시 길을 잡아야 해서 뒤편 당산봉 쪽으로 살짝 둘러 계단을 십여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제주올레 리본과 화살표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 생이기정에 도착하게 된다. ‘생이’는 제주말로 ‘새’란 말이고 ‘기정’은 절벽이란 뜻이다. 가마우지와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절벽을 타고 날아오르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되는데 바다 새들이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여진 모양이다. 여기 생이기정 위에서부터 제주올레 12코스가 끝나는 용수포구까지 불과 2~3Km의 길은 환상적이다.      


* 찾아가는길     


수월봉은 개인차량이나 렌터카로 이동하는 게 좋다. 수월봉 정자 아래에 주차장이 있으므로 그곳에 차를 대고 수월봉 지질트레킹 코스를 따라 걷다가 생이기정 위로 올라서서 용수포구까지 내처 멋진 풍광을 끼고 조금 더 걸으면 제주올레 12코스 종점이자 13코스 출발점에 도착한다.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과 성당을 호젓하게 둘러보고 난 뒤 한경 콜택시(064-772-1818)로 연락해서 택시를 타고 다시 출발점으로 복귀하면 된다.    

  

* 주위추천명소   

 

- 차귀도

수월봉과 생이기정에서 멀리 바라만 보았던 차귀도는 현재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언제든지 탐방할 수 있다.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로 차귀도 선착장에서 매일 운항하는 배편을 이용해 15분 남짓 가면 차귀도에 도착한다. 1시간~1시간 30분 정도 차귀도 섬 전체를 한 바퀴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차귀도를 천천히 음미하며 돌고 난 후 섬 언덕 마루에 올라 차귀도에서 다시 수월봉과 제주도 본섬을 바라보는 풍광은 가파도에서의 그것과 또 다른 무엇이다. 섬 산책을 마치고 섬 포구로 약속된 시간에 맞춰 돌아오면 차귀도에서 출발했던 바로 그 여객선을 타고 차귀도 일대 섬들을 일주하며 섬의 역사와 풍광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수월봉~용수포구 제주올레와 함께 차귀도를 묶어 다 같이 걸어보길 권한다. 차귀도 유람선(064-738-5355)은 매일 오전 10시 30분과 오후 2시 30분 두 편 운행되는데 계절과 기상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므로 사전에 확인하고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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