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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식 Mar 25. 2020

< 길 위의 명상 >

2. 두려움_제주올레10코스 산방산~송악산둘레길



  내안의 그 목소리와 한 약속을 흘려보낼 수 없었다. 그때부터 앞으로 그 목소리와 약속한 나의 존재이유와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하는 과정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그 해답을 알려줄 만한 사람들을 수소문하며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 생의 근원을 향한 질문을 손에 들고 헤매며 미친 듯이 찾아다닌 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결론이 내려졌다. 어느 철학자도 어떤 종교인도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려줄 수 없다는 것,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나 스스로’만 구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 그런데 어떻게?, 다시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2007년, 2003년의 그날로부터 4년이 지나는 동안 매일 시간을 뭉개고 앉아 있다는 답답함에 두려워하면서도 ‘나 스스로’의 의미와 방법을 정확히 몰랐기에 그저 방황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막연한 불안함만 더욱 커져 갔다. 뭔가를 찾아 해야 하는데, 그 뭔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며, 생계를 위해서는 회사를 다녀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는 게 더 이상 변명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조여 오는 느낌이 암시하는 바는, 회사 생활과 병행하는 것으로는 결코 그 목소리가 건네준 나의 과제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숙제를 하기 위해 나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 나의 하루를 그 당시 대부분 다 잡아먹고 있던 회사 일을 그만두고 전심전력하지 않으면 결코 그 해답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또 반복적으로 엄습해 왔다.  

      

  유달리 온순했으며 착했던 나는 어릴 적 부모님이나 어른들의 안목으로 보아 반듯하고 착한 아이었다. 모범생이었기에 늘 칭찬을 들어왔고 나도 부모님과 주위 분들의 그런 시선을 싫어하지 않았다. 또한 마땅히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의 삶을 그들의 지침에 맞춰 살아가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동안 지켜만 봐오던 어른들의 시선과 기대는 그들의 안목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는 직업과 일로 연결된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는 것으로 다시 강권되었다. 별다른 뚜렷한 나의 생각과 바람이 없었기에 그저 그래야 하나 보다 하고 나는 다시 그들의 이끌림에 맞춰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나선 또, 그들의 생각에 맞춰 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할 만한 직장 중 하나를 선택했고, 그 직장에서도 남 눈에 띄기 좋은 일들을 선택하고 또 부여받아 일을 해 온 것이다. 그렇게 10여년을 넘게 타인의 시선에 맞춰 멋지고 행복할 거라는 직업을 가지고서 스스로도 자부하며 지내왔는데, 그런 직장을 그만두라니 (사실 아무도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다. 다만 내가 느낌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만 다시 앞이 캄캄해졌다. 그때까지 살아온 날들마다 매 순간 중요한 결정을 할 땐 늘 부모님과 주위 어른들의 적극적인 권유와 간섭 내지 강권이 끊일 날이 없었는데, 이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결정과 행보를 나보고 직접 하라는 주문이 들어온 것이다. 나 스스로 나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 시작은 지금까지 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은 현재의 삶의 정리, 즉 우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다. 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첫 번째 미션이 내려진듯했다. 내가 스스로 숙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뒤집어 엎는 것, 그것들과의 결별 그리고 정리가 가장 먼저 주어진 것이다. 당장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 그것부터가 암담했는데 왜 이런 속수무책의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을까, 정말 느낌대로 따라가는 것이 맞기는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릴 적 나의 삶을 이끌어주던 부모님과 주위 분들 대신하여 이젠 그 목소리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또다시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혹시나 또 그 느낌을 무시해서 아이의 건강과 생명이 잘못된다면 하는 두려움 때문에 목소리가 원하는 대로 그 느낌의 일을 저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2007년 초, 회사에 사직서를 내밀었다.      

  그렇게 인생의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열정을 다 바쳤던 짧지 않은 시간을 뒤로하고 무작정 새로운 길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느닷없이 내민 사직서에 주변에선 적잖은 반응들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도 아프고, 거기에 버블닷컴때 주식투자하느라 은행에서 잔뜩 대출도 끌어다 써서 부채도 한 가득인 마당에 당장 회사를 그만두면 아이 병원비며 당장 갚아야할 은행대출금은 어찌할 것인지 그런 내 형편을 모르지 않았기에 사표소식을 들은 주위 분들이 기함을 했다. 더군다나 회사에서는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맡아 승승장구 승진코스를 잘 밟아오던 차에 갑자기 사표를 내는 것 자체가 아무리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데 남들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내안의 목소리가 전하는 느낌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회사에 이해를 구하는 것 자체가 더욱 이상한 일이었기에 그저 주위의 수군거림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사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길도 막막하고 회사를 그만둔 다음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나는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었던 회사를, 나의 생계와 세상에서의 존재 이유였던 최후의 보루를 그렇게 저버려야 했다. 천 길 낭떠러지 앞으로 무작정 발을 내디뎌야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감행했다. 앞뒤 좌우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마치 자살특공대가 되어 적함으로 미사일을 달고 전투기를 내몰아야 했던 가미카제 특공대처럼 암흑으로 하나도 보이지 않아 죽음만이 있을 것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던 절벽 위에서 한걸음 허공으로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우선 아이부터 살리고 봐야 했다. 아니 솔직히 표현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먼 훗날 언젠가 변명할 거리가 없어 절망하며 울부짖을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지금 그 죽음의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미래의 나를 살리기 위해 지금의 나를 죽이는 것, 이 표현 이외에는 달리 그 당시의 내 모습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00기업의 00팀장이라는 나의 직함은 한참 동안 보류되었던 사표가 수리되던 날부터 더 이상 나를 대변할 수 없었다. 내가 더 이상 명함으로 나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하게 되자 일순간 나와 세상사이의 관계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빨리 그렇게 많은 연락처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나는 과연 그동안 무엇이었기에 나의 사표와 동시에 이렇게 고립무원에 갇힌 듯 아무도 연락이 없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학창 시절 오랜 동기들이나 간혹 안부를 묻는 연락을 해왔을 뿐 지난 10년이 넘는 사회생활은 불과 몇 개월 만에 나를 알카트래즈 감옥의 외딴섬 안으로 고립시켜 버렸다.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때야 깨달았다. 사람들이 나와 함께 했던 이유를. 나는 그들을 어떻게 보았건 그들은 개인적인 호감도 있었겠으나 나라는 사람의 개성이 아닌 나라는 사람의 회사와 그 회사의 담당자로서의 중요성만이 절대적으로 컸던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고 섭섭해 할 일이 아니란 걸 또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어느 회사 어느 부서의 역할 담당자인 나와의 교류가 그들의 생계수단으로서의 일이었으므로 그 일에 충실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어느 회사 소속의 직원이 아닌 나는 더 이상 만나거나 연락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속도로 사직 후의 관계 정리를 당하면서 그간 ‘나의 것’과 ‘나의 결정’으로 살아오지 않은 삶을 철저히 후회하고 곱씹어 보게 되었다. 내 것인 줄 알았던 나의 직장은 내가 그 조직으로부터 떠나는 날부터 나와는 전혀 무관하게 철저히 남이 되어버렸다. 내 것이라면 조직 안에 있건 없건 나와 그 조직은 불과분의 관계였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언제든 그 조직의 대체 가능한 일부로 소용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되새겨야 했다. (사실 12년간의 회사생활은 무척 다이내믹했고, 많은 경험과 새롭고 넓은 세상을 만나게 해 주었다. 밥벌이를 위해 마지못해 다닌 곳이 절대 아니었음에도 결국은 회사와 나의 관계가 그랬다.) 그런 줄 알았더라면 왜 내가 나의 전부인 양 그곳에 나의 20대 후반과 30대의 대부분을 힘과 성을 다해 쏟아 부었는지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나의 것이 아닌 곳에 나를 헌신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의 헛됨을 이렇게 빠르게 확인하게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철저히 혼자가 되었고, 넋이 빠졌고, 아무런 방향성도 갖지 않은 채 스스로 내동댕이쳐졌다. 내안의 목소리가 전해준 그 느낌을 따라 부모님과 주위의 말을 듣지 않고 나 홀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한 내 인생 두 번째 일이었다. 그 경험은 내안의 목소리가 인도한 것임을 긴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도 ‘나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른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갔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흩어져가는 듯했다.  

     

***     


첫 번째 길제주올레10코스 (산방산~송악산둘레길)   

  

  만약 시간이 주어져 21일 동안 제주도의 21가지 길을 모두 걷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처음에 어디서부터 걸으면 좋을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그럴 때면 제주의 숨겨진 명소로 주저 없이 제주올레 10코스 중 산방산~송악산둘레길 구간을 추천한다. 어떤 이유로 누구와 함께 무엇을 바라고 왔건 대부분의 취향을 아우르면서 도시인들이라면 그 길 위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는 특별한 자연을 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여정이 출발점이었던 안덕면 사계리 단산(바굼지오름) 정상에서 바다 방향으로 한 시야에 들어오는 곳이 바로 이 구간이기도 하다. 제주올레 10코스 중에서, 마치 투구를 엎어 놓은 듯 제주도의 남서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산방산의 진면목을 바로 턱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산방연대에서부터 용머리해안을 거쳐 사계해변을 따라 송악산둘레길에 이르기까지 약 7km 정도의 구간을 첫 번째 길로 정했다. 이 구간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지질학의 명소들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아픔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곳으로 그 면면들의 아름다움과 함께 깊이 팬 제주의 역사와 수많은 이야기들이 다발로 엮여 있다. 제주의 길 중 지난 10여년이 넘는 동안 족히 수십 번은 넘게 걸은 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발걸음을 올렸던 이 길 위에서, 나는 그 걸음의 숫자만큼이나 전에 없던 다른 생각들을 켜켜이 쌓아 갔고 또 그만큼 추억을 가장 많이 그리고 선명하게 간직한 곳이다.      

    

  왜구나 해적들의 침략을 알리기 위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연락을 취했던, 제주도 해안선을 끼고도는 해안의 요지마다에 설치된 연대(煙臺)들 중 산방산 코앞에 위치한 산방연대는 그 장소와 산방산과의 조화로 아직도 그 위용이 출중하다. 산방산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바로 옆 산방연대에 올라 주상절리 절벽을 따라 정상까지 올려다보면 불과 395m 정도의 오름임에도 산방산은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과시하고 떡하니 서 있다. 산방산도 제주도의 수많은 기생화산인 오름들과 같은 용암의 분출을 거쳐 형성된 곳인데, 점성이 매우 높은 조면암질 용암이 화구로부터 아주 천천히 흘러나와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이내 굳어버려 종모양의 독특한 용암돔을 형성한 것이 바로 지금의 산방산 모습인 까닭이다.         

  사계리해변을 따라 계속 걷다가 마라도와 가파도가 보이는 제주도 남서쪽 끄트머리에 볼록하고 튀어나온 송악산둘레길에 접어들게 되면, 왼편으로는 지나온 산방산과 사계리해변과 함께 멀리 한라산이 파란 하늘 구름 속으로 그림같이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광활한 바다가 180도 넘게 펼쳐지는 곳이 나타난다. 이름은 송악산이라 불리는 용암의 분출로 깊고 둥근 분화구까지 갖춘 제주도 최남단의 오름을 끼고 너른 바다 절벽 위를 뺑 둘러 걷게 되는데, 이곳이 제주도의 21가지 길 중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라고 말하고 싶다. 송악산둘레길은 얼마나 더 이 길을 걸어야 행여나 지겨워질 수 있을까를 갈 때마다 떠오르게 하는 길이다.      

  산방연대부터 송악산둘레길까지 모두 걷기 힘들거나 시간이 허락지 않는 분들에게는 산방연대에 오른 다음 다시 차로 이동해 송악산둘레길만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송악산둘레길은 3km 남짓 거리로 한 바퀴를 도는 형태로 길이 이어져 있는데, 제주올레 진행방향(파란색화살표 방향)보다 시계반대방향(주황색화살표 방향)으로 걷는 게 훨씬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방법이다. 송악산둘레길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지 말고 송악산둘레길 출구 쪽 소나무 숲 앞에 있는 임시 소형 주차장에서 출발해서 송림 쪽으로 먼저 길을 잡아 마지막 나오는 곳이 사계리해안 방향의 원래 입구 쪽으로 걷는 것을 추천한다. 걷는 피곤함이 덜할 뿐만 아니라 백만 불짜리 풍광을 송악산둘레길의 마지막에 다시 조우하는 기쁨이 압권이다. 산방연대에서 출발해 (용머리해안을 들렀다) 사계해변을 지나고 송악산둘레길까지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시간과 체력이 된다면 내처 제주역사의 현장으로 구성된 다크투어리즘의 장소들로 이어지는 섯알오름 4.3 학살터와 알뜨르비행장 그리고 하모해수욕장에 이르는 전체 12km 구간을 계속 이어서 걸어보길 추천한다. 여유 있게 총 3~4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구비 구비 다른 풍광들을 펼쳐내는 제주의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의 아픔이 얽혀 있다. 

     

* 찾아가는길  

   

산방산을 가는 방법은 제주시외버스터미널이나 서귀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2번 버스를 타거나, 모슬포 운진항 버스종점에서 752-1번 지역순환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752-1번 버스는 모슬포 운진항 종점에서 바닷길을 따라 송악산둘레길과 알뜨르비행장을 거쳐 산방산을 지나니 개별 차편이 없는 분들은 버스 드라이브로도 좋겠다. 대정읍이나 안덕면 일대에서는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으니 대정안덕콜택시(064-794-0707/064-792-0082)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 주위추천명소    

 

- 모슬포오일장 & 산방산탄산온천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면 모슬포항으로 이동해 포구의 맛집들에서 해산물도 맛보고 때가 맞으면 매월 뒷자리 1일과 6일에 서는 모슬포 오일장도 한번 방문해 보길 권한다. 언제나 시골장엔 활력이 넘치므로 삶이 우울해질 겨를이 없다. 끝으로 제주엔 물이 귀하고 온천 또한 거의 없는데 산방산 북서쪽에 자리 잡은 산방산 탄산온천에 가면 27~28도의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탄산온천에서 여독을 푸는 맛이 색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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