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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식 Mar 21. 2020

< 길 위의 명상 >

1. 첫 만남_단산



  이야기는 아무래도 여기서 시작하는 게 맞겠다. 13년 전 아무것도 모른 채, 준비되지 않은 도시민이었던 내가 더 이상 관광객이 아닌 제주도민으로 찾아와 이곳 단산(바굼지오름)에서 처음으로 마주하고 섰던 바다의 풍광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2009년 겨울 무작정 내안의 목소리를 따라 제주도로 내려와서, 앞으로 계속 제주도에서 살게 된다면 그 터전은 여기일 수밖에 없는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목소리를 처음 만났던 건 그보다 훨씬 전인 2003년 5월 23일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일부러 구식 벨이 울리는 전화기를 사두었는데 밤 11시가 지난 늦은 시간에 요란하게 울린다. “빨리 서울아산병원 응급실로 와야겠습니다. 큰아이가 아픕니다.” “네?! 음...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급히 옷을 챙겨 입고 나와 택시를 잡으러 큰길가로 나섰다. 불길한 마음에 도저히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온갖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얼마나 많이 다친 건지, 얼마나 급했으면 그 늦은 시간에 그것도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을까.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좌불안석이 되어 택시에서 조마조마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어떤 목소리가 느껴졌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목소리임에도 들리는 게 아니라 느껴졌다. 누가 곁에서 다른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아니었으므로 귀로 들리는 건 아니었고 소리가 온 몸으로 그냥 느껴졌다는 표현이 가장 가깝다. 그냥 느낌인 건가, 아니면 잡념 같은 생각을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 목소리가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전해오는 메시지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강렬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신호를 보냈는지... 그런데도 당신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스스로의 목숨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큰아이를 통해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경고처럼 들렸던 목소리의 구체적인 내용은 목소리를 느낀 순간 즉시 전체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내가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 보겠습니다.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만약 이번에도 당신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무시한다면 그때는 어떤 벌을 받아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나는 오늘에서야 당신 목소리를 처음 들었습니다.” 그러자 택시는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응급실 한켠 불이 꺼져 어두웠던 응급실의 문을 열자 큰아이가 지친 모습으로 널브러진 듯 엎드린 채 있었다. 온 몸이 불덩이같이 뜨거웠고 가는 숨소리가 무척 힘겨워 보였다. 병명은 ‘소아급성림프구성백혈병’이라고 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아니 아이에게 생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여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앞날이 캄캄했다. 너무나 두려웠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는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에 대고 평생의 약속을 해버렸고, 그 목소리는 앞으로 나를 지켜보겠다는 느낌으로 연극무대의 조명처럼 페이드아웃 되며 사라지는 듯했다. 엉겁결에 아이의 생명과 나의 삶을 좌지우지하게 된 그 약속은, 아이의 병상을 확인한 순간부터 행여 사악한 마음으로 치부해 함부로 번복할 수 있는 잡생각으로 여길 수 없었고 또한 사람이 다급한 상황에서 마지못해 지어낸 영화나 소설에서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기이한 일로 여겨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생사를 오가는 마당인데 그 아이를 살리는 방법이 왜 나의 존재이유와 생의 목적과 방향을 찾고 구하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생의 숙제를 받은 것처럼 전후좌우로 꽉 막혀 아무 곳으로도 피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외통수, 진퇴양난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하는지, 누구에게 물어보면 해답을 알려줄 수 있는지,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목소리의 ‘마지막’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목소리를 찾아야 했다. 목소리를 다시 만나야 했다. 차분히 조목조목 이유를 묻고 길을 물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두 번 다시 똑같은 경고도 없었다. 그냥 바라보는 시선만 존재하고 있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그때가 내안의 목소리가 나에게 신호를 보낸 첫 날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나기까지 얼마나 아득하게 긴 시간이 흘러야했는지,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 느낌으로 닥친 생각 하나가 삶을 통째로 바꾸어 버렸다.     


***     


출발점 단산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 와서 머무르는 동안 후학을 양성했던 대정향교가 있다. 그 대정향교를 품고 있는 조그만 오름이 있는데 이름이 ‘단산’이다. 멀리서 보면 대바구니 모양이나 박쥐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바굼지오름’이라고도 한다. 이곳 단산을 서쪽 능선 입구를 따라 20분 정도 살짝 땀 흘려 걸어 올라가면 정상에 곧 닿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제주도 남서쪽 남태평양으로 이어진 바다 풍광이 장관이다. 왼쪽으론 독특하게 생긴 산방산이 웅장하게 앉아있고 남쪽 바다 한 가운데로는 형제섬이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송악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단산에서는 송악산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그 뒤에 바로 가파도와 마라도가 있다.       


* 찾아가는길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와 인성리에 접해 있는 단산으로 가려면, 대중버스는 제주시 종합버스터미널에서 대정읍 운진항 방면 버스에 탑승해서 인성리 또는 사계리에서 내려 15분쯤 걸으면 된다. 버스를 타면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이동한다. 개인차량은 ‘대정향교’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대정향교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단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주차장에서 왼쪽방향으로 2백 미터쯤 떨어진 도로 경사 끝 지점에 있는 ‘단산사’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 표지석을 끼고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샛길로 들어가면 단산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단산 북쪽사면에 정식진입계단이 있지만, 약간의 등산 겸 살짝 땀 흘리며 이 길로 올라가다보면 단산의 분화구가 마모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꼭대기로 연결된다. 길이 조금 험하지만 노약자나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이 코스를 추천한다.     


* 주위추천명소     

    

- 제주추사관

단산 바로 아래 대정향교와 단산에서 걸음으로 20~30분정도 거리에 있는 ‘제주추사관’은 들러보길 권한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서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 동안 유배생활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대정향교를 들러보면 당시 대정현 훈장이 추사에 요청해 받아 놓은 ‘의문당’이라는 현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의심나는 것을 묻는 집’이라는 뜻이니 이번 여정의 시작과도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제주추사관은 세한도 속의 집에서 영감을 얻어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를 한 곳으로 먼저 지하로 들어가 추사의 이야기들을 관람한 다음 1층으로 올라가면 조각가 임옥상의 손길로 태어난 추사의 붉은 무쇠 흉상을 만나게 되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어떤 울림이 깊게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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