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가 통째로 필사한 시집이 있다.
시인의 이름은 백석, 시집은 〈사슴〉이다.
윤동주는 100부만 출간된 〈사슴〉을 직접 구하기 힘들어, 도서관에서 종일 시집을 필사했다.
1988년, 월북 및 재북 작가가 해금된 이후 백석은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도 꼽힌다. 해금조치는 잊힌 이름들을 불렀다. 윤동주가 탐닉한 아름다운 시와 시인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금세 퍼졌음은 물론이다.
월북 및 재북 작가가 해금되지 않았다면 백석은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고 아는 사람만 아는 시인이 됐을테니 이는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도 불운한 일이 되었으리라.
백석의 영향을 받은 시인도 지금보다는 적을 것은 쉬이 짐작 가능하다.
‘똑똑한 사람은 다 평양 가고 서울엔 쭉정이만 남았다’라는 말이 있다.
이태준,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 홍명희, 임화, 백석, 이용악 등 120명에 달하는 문인들이 북쪽에서 자의 또는 타의로 여생을 보냈다.
북의 그네들이 똑똑하고 남의 문인들이 쭉정이였다는 말은 동의하기 힘드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분단과 이념은 한반도의 문학을 빈약하게 만들었다.
북으로 간 그네들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다면 한국문학은 좀 더 풍성해졌음이 틀림없다.
북한의 문학도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기에 그 가능성은 너무나 아쉽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반체제 문학은 중국에서도 구소련에서도 있었지만 북한은 없다.
단편소설집인 《고발》이 그나마 알려졌다.
북한의 절망적인 창작 환경을 알려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은 북으로 건너간 백석을 다룬 소설이다.
백석이 완전히 절필하는, 1956년에서 1962년까지의 마지막 일곱 해를 다룬다.
백석은 59년 삼수읍으로 추방된 뒤, 62년부터 사망한 해로 알려진 96년까지 시를 쓰지 않았다.
소설에서 백석은 본명인 (백)기행으로 나온다.
북에서는 시인들이 원하는 대로 시를 쓰지 못하고 당의 이념에 따라 시를 써야만 했다.
백석은 북한에서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고 아동문학에 주력했다.
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인은 62년에 마지막으로 이런 시를 남겼다.
이때 원수님은 원쑤들에 대한 증오로
그 작으나 센 주먹 굳게 쥐여지시고
그 온 핏대 높게, 뜨겁게 뛰놀며
그 가슴속에 터지듯 불끈
맹세 하나 솟아올랐단다
‘빼앗긴 내 나라 다시 찾기 전에는
내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리라’
백석, 〈나루터〉
알려진 시들처럼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서투른 시다. 원수 같은 이념 때문에 쓴 억지 찬양이다. 기행의 시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다.
작품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백)기행의 행적은 아니다. 우리는 그 행적을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소설에서의 행적도 알려진 사실을 빼면 작가가 상상력으로 채운 허구다.
대체역사소설이라면 기행의 시집이 구소련 문인들에게 전해져, 그들이 한반도에 이런 시인이 있냐고 놀라워하고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실패한 시인의 이야기는 그리 순조롭지 않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아름다운 시어를 쓰던 기행이 이런 시를 쓰기까지, 그리고 다시는 펜을 들지 않기까지 무슨 마음을 품었는지를 추적한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다.
공산당이 원하는 인간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 슬픔을 모르는 인간, 고독할 겨를이 없는 인간’이라는 사회주의적 인간이기에 기행은 시를 쓰지 못한다.
‘시는 깊어야 하며, 특이하여야 하며, 뜨거워야 하며 진실하여야 한다.’고 믿는 기행은 시를 쓰지 않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고 노래하던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다. 아직도 사랑받는 아름다운 시를 쓰던 시인이 글을 쓰지 못한다.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을 시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행은 시인이다.
창작의 여부로 따진다면 북한에서 기행은 실패한 시인이다.
〈나루터〉 같은 시를 마지막으로 쓰고 숙청되었으니 체제를 찬양한 것도 사실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여우난 곬족〉 등을 쓴 시인이 시를 쓰고 싶지 않았을까.
공산당의 이념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다시 한번 노래하고 싶지 않았을까.
할 수 있다면 미당처럼 자신의 신념을 배신해서라도 노래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시인이다.
그 재능은 윤동주도, 해금이 된 이후의 시인들도, 교과서와 시집으로 접한 우리들도 모두 알고 있다.
시를 쓰고 싶은 마음과 시를 지키고픈 마음이 갈등했을 터이다.
작가는 꺾이고 너덜너덜해지고 시대와 불화하는 그 마음을 문학의 형태로 되살리고 있다.
숙청되어 추락만이 남은 기행 앞에 그의 시를 기억하는 서희가 나타난다.
서희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기행 앞에서 읊는다.
기행이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더라도, 그의 시는 ‘이제 시는 자신의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불행과 시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기행이 썼던 아름답고 진실한 시는 절로 생겨나 숲을 활활 태우는 천불처럼,
시를, 문학을, 한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불씨가 된다.
서희의 입을 빌려 기행이 삼수읍으로 간 이유는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삼수읍 행은 마냥 실패는 아니다. 시인 기행은 실패한 시인이 아니다.
북한에서 백석은 아직도 금지된 이름이다.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실패하고 시도 사라지리라 생각했을 백석의 시는,
우리나라에서 해금 이전에도 암암리에 눈 밝은 이들에게 불씨처럼 남아있었다.
해금 이후 그 불씨는 천불처럼 절로 번져 오늘날에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저 북쪽에서도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의 시가 완전히 잊혔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어두운 곳에서도 고통 받고 슬프고 고독한 누군가는 윤동주처럼 그의 시를 필사하고, 뜨겁고 진실한 시를 읽고 있으리라.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복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