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딱정벌레의 비밀

장아아링의 〈봉쇄〉 판본 비교

by 백수광부



장아이링의 중단편집 《전기 傳奇》 는 1944년 8월 15일 상하이 잡지 월간사에서 초판본이 발행되었다. 작품의 수는 10편이다.

현재 대만의 황관皇冠文化出版 출판사에서 판매 중인 《전기》와 작품이 동일하다.


《전기 傳奇》 초판본에 실린 작품은 다음과 같다.

〈황금 족쇄 金鎖記〉, 〈경성지련 傾城之戀〉, 〈자스민차 茉莉香片〉, 〈첫번째 향로 第一爐香〉, 〈두번째 향로 第二爐香〉, 〈유리기와 琉璃瓦〉, 〈심경 心經〉, 〈젊었을 때 年青的時候〉, 〈꽃이 지다 花凋〉, 〈봉쇄 封鎖〉다.


이후 1946년 11월 상하이 산하도시공사에서 〈낡은 감정 留情〉, 〈난새의 경사 鴻鸞禧〉, 〈붉은장미 흰장미 紅玫瑰與白玫瑰〉, 〈기다림 等〉, 〈아샤오의 슬픔 桂花蒸 阿小悲秋〉을 추가하여 개정증보판增訂本을 출판했다.

국내에 출간된 문학과지성사 판은 이 개정증보판에 있는 중단편 15편 및 〈중국의 날 中国的日夜〉을 《첫번째 향로》와 《경성지련》, 두 단행본에 나누어 실은 작품이다.



단편 〈봉쇄〉에서는 상하이에 공습경보가 울리며 거리가 봉쇄된다.

경보 소리는 차갑고 작은 점으로 모이고,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점선’이 되어 상하이 거리는 햇빛 속에서 졸며 꿈을 꾼다. 공습 경보로 봉쇄된 거리에서 노면전차도 멈추어 선다.

전차에 탄 뤼쭝전과 추이위안도 꿈을 꾼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꿈이다.

봉쇄된 시간 동안 둘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지만 봉쇄가 풀리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뤼쭝전은 작별을 고하고 추이위안은 ‘비이성적인 꿈을 꾸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첫번째 향로》의 〈봉쇄〉(이하 문지 판)는 민음사에서 출간된 《색, 계》의 〈봉쇄〉(이하 민음사 판)와 번역이 다르나 그 외에도 아주 큰 차이가 하나 있다.


그 차이는 아래 문단의 유무다.


뤼쭝전은 저녁 시간에 맞춰 집에 도착했다. 그는 저녁을 먹으면서 막 부쳐온 딸의 성적표를 봤다. 그는 아직 전차 안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있지만 취위앤의 얼굴은 이미 희미해졌다. 그녀의 얼굴은 원래 잘 잊히는 얼굴이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했던 말은 분명하게 기억했다. 부드럽게 “당신…… 몇 살이지요?” 했고, 격앙되어서 “나는 당신에게 자신의 앞날을 희생하라고 할 수 없어요!”라고 했었다.
식사 후, 그는 뜨거운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으면서 침실로 들어가 전등을 켰다. 검은 딱정벌레가 방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반쯤 기어가다가 불이 켜지자 바닥의 한가운데 엎드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체하는 걸까? 생각을 하고 있나? 하루 종일 이리저리 기어다니면 생각할 시간이 너무 적겠지? 그러나 생각한다는 것은 필경 고통스러운 것이다. 쭝전은 전등을 비틀어 끄고 손으로 스위치 위를 눌렀다. 손바닥이 축축해지고 온몸에서 땀이 한 방울 한 방울 스며 나왔다. 마치 작은 벌레가 간질간질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등을 켰다. 검은 딱정벌레가 보이지 않았다. 벌레 구멍으로 기어 돌아갔다.

장애령, 「봉쇄」, 『첫번째 향로』, 김순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335쪽


뤼쭝전이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검은 딱정벌레가 등장하는 문단은 민음사 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차 기관사의 욕설인 豬玀!가 “이런 얼뜨기가!”로 번역되고 소설은 끝난다.

문지 판에서는 “돼지 새끼!”란 욕으로 번역되고 인용한 위 문단이 뒤이어 나온다.

황관출판사의 《경성지련》에서도 문지 판에 추가된 문단은 보이지 않는다.


SE-b0825116-61e9-4318-a03b-664a86519f89.jpg?type=w773 張愛玲,〈 封鎖〉, 《傾城之戀》, 皇冠文化出版, 2025. p. 176



이 문단은 어디서 등장했을까?

홍콩의 신문 밍바오 明報의 기사에서는 이 추가된 문단이 어디서 나왔는지 밝히고 있다.



장아이링 연구자인 천쯔산에 의하면,

1943년 11월 상하이 『천지』 제2호에 발표한 〈봉쇄〉에서는 위 문단이 존재했다.

사흘 만에 4,000부가 매진된 《전기》 초판본에도 해당 문단은 남아있었고, 한 달 후 출간된 재판본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기》 개정증보판에서는 해당 문단이 삭제되었다.

그 이후 홍콩 천풍서국과 대만 황관출판사에서 출간된 《장아이링 단편소설집》, 그리고 《장아이링 전집 張愛玲全集》에서도 모두 문제의 문단이 삭제되었다고 한다.

이후 출판된 거의 모든 단행본의 〈봉쇄〉는 이 문단이 삭제된 〈봉쇄〉다.

즉 민음사 판은 이 문단이 삭제된 판본의 〈봉쇄〉다.


〈봉쇄〉는 상하이가 봉쇄되어 ‘거대한 도시가 햇빛 속에서’ 졸며 “불쌍하구나, 불쌍하구나! 땡전 한 푼 없는 사람이라니!”라는 거지의 노래와 이를 따라 부르는 전차 기관사의 목소리로 환상의 시작을 고한다.

봉쇄가 풀리며 추이위안이 '비이성적인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전차 기관사의 “불쌍하구나, 불쌍하구나! 땡전 한 푼 없는 사람이라니!”라는 노래가 다시 한번 나오며 상하이 거리가 사랑이라는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띤다.

이러한 구조에서 장아이링은 뤼쭝정이 집으로 돌아온 내용이 사족에 가깝다고 판단해 해당 문단을 삭제했으리라.

그렇기에 장아이링은 삭제한 〈봉쇄〉를 다시 되돌리지 않았다.

문단이 삭제된 민음사 판을 보면 해당 문단이 있는 문지 판보다 구조적 완성도가 더 뛰어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천쯔산이 말했다시피 검은 딱정벌레가 등장하는 문단이 있는 단행본은 일부에 국한된다.

문지 판은 어째서 검은 딱정벌레가 나오는 문단이 있을까?


문지 판은 대산문화재단의 외국 문학 번역 지원을 받은 대산세계문학총서의 하나다.

김순진 번역자는 장아이링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집필했다.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는 당연하고, 국내에서 최초로 장아이링의 단편소설을 번역하는 만큼 많은 자료를 참조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니 연구 자료나 다른 자료를 참조했겠다고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개정증보판을 참조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나온 홍콩 천풍출판사나 대만 황관 출판사의 장아이링 단편소설집만 참조했다면, 개정한 버전의 〈봉쇄〉와 동일하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중화권 〈봉쇄〉 도서 리뷰에서도 검은 딱정벌레를 언급하는 이들과 검은 딱정벌레가 나오는 문단을 자신의 책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댓글이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이들이 다른 판본의 도서를 읽었음을 알려주는 예시다.


중국에서는 1992년 안후이문예출판사安徽文艺出版社 에서 《장애령 문집 張愛玲文集》이 출간되었다.

《장애령 문집 張愛玲文集》은 해금 이후 중국의 일반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된 장아이링 전집이다.

해금 이전, 중국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장아이링 작품이 금지되었다.

편집자들은 장아이링의 작품 전반을 처음으로 소개하기에, 편집에 앞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장아이링의 원고 및 자료를 먼저 모을 필요가 있었다.

이 문집은 대만에서 장아이링의 자료를 모은 탕원뱌오의 《장아이링 책 張愛玲卷》, 《장아이링 연구자료집 张爱玲研究资料集》과 장아이링 연구자인 천쯔산이 발굴한 중단편소설 등을 바탕으로 추가, 편집한 자료다.

탕윈뱌오의 《장아이링 연구자료집 张爱玲研究资料集 》에 실린 〈봉쇄〉는 상하이 『천지』 에서 발표한, 그러니까 문단 삭제 개정 이전의 작품이다. 이 문집에 실린 〈봉쇄〉 역시 검은 딱정벌레가 있다.

초판 5,000부를 출간한 문집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 초판 매진은 물론이고, 해적판까지 나올 정도로 잘 팔려 5~60만 질까지 판매되었다. 중국의 장아이링 열풍은 이 문집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봉쇄〉 의 검은 딱정벌레를 언급하는 이들은 《장애령 문집 張愛玲文集》을 읽었거나 그걸 바탕으로 나온 단행본이나 《전기》 초판복각본, 연구 자료 등을 읽었다 추측할 수 있다.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장아이링을 알린 《장애령 문집 張愛玲文集》과 국내에서 장아이링을 소개한 문지 판에 동일하게 검은 딱정벌레가 있는 문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공통점이다.

문단이 삭제되지 않은 개정 이전의 작품으로 먼저 소개되고, 그 이후 작가의 의도대로 문단이 삭제한 판본의 〈봉쇄〉가 뒤이어 나왔다.

이 우연의 일치는 발굴에서 작가의 의도 구현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민음사의 《색, 계》 출간은 독자들에게는 의도치 않았지만 검은 딱정벌레 문단의 유무로 작품의 원형과 개작 과정을 비교해 읽는 즐거움과 기회가 되었다

SE-bbd8a59f-ed51-46d9-8022-132525d2fc90.jpg?type=w773 황관출판사의 장아이링 타계 30주년 기념 모변본양장한정판 《경성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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