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은 살인입니까

로런스 블록의《살인해드립니다》

by 백수광부



프랑스 파리.

상품에나 있어야 할 바코드가 머리 뒤에 있는 검은 양복의 대머리가 오페라 극장에 들어선다.

목표는 둘이다. 처리할 방법은 많다.

폭탁을 설치하거나 소품용 총을 실총으로 바꿔치기한다.

권총이나 저격용 총으로 머리를 조준해 소리없이 죽여도 좋다.

제거에 성공하면 유유히 극장을 빠져나오면 그만이다.

요란한 방법이나 조용한 방법이나 선택은 게이머의 몫이다.


게임 히트맨 시리즈처럼 암살자에 몰입해 목표를 화려하고 멋지게 제거한 경험이 있다면,

살인할 일도 당할 일도 없는 평범한 독자에게 로런스 블록의 《살인해드립니다》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을 포함한 10편의 이 연작 단편은 살인청부업자 켈러가 주인공이다.

뉴욕의 살인청부업자 켈러(Keller)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킬러Killer에서 철자를 바꾼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에게 이미 직업 경력이 생겨 있더군. 그게 사람들을 없애는 일이었던 거야. 그런 일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소질도 없었는데 알고 보니 관심이나 소질은 필요가 없더라고. 할 수만 있으면 돼. 처음에는 누가 하라고 해서 했고, 두 번째도 누가 하라고 해서 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게 하는 일이 되어 있었어. 그렇게 스스로를 규정한 후에야 기술적인 부분을 배우기 시작했지. 총, 다른 도구, 무기 없이 발휘하는 기술. 사람들을 처리하는 방법. 알아야 할 것들을 말이야.
사실 알아야 할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아. 고등학교에서 직업에 대해 해주던 말과 달라. 진로는 준비하는 게 아니야. 중간에 우연히 그 일에 대비하게 만든 사건들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진로는 자기가 선택하는 게 아니야.

《살인해드립니다》 中


켈러는 살인청부업자다.

뒷머리에 바코드를 찍지는 않았고, 살인으로 쾌락을 느끼는 부류도 아니다.

의뢰를 받으면 목표물이 있는 지역으로 떠나 제거하고 돌아온다. 살인은 그에게 그저 비즈니스다.

감정을 제거한 냉혈한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출장지를 돌아다니며 다른 삶에 대한 유혹적인 몽상에 젖어 드는 일이 많은 중년이다. 크로스 워드를 풀고 영화를 보며 우표를 수집하고 술과 커피를 마시는, 8백만 명의 뉴욕인 중 하나다.

출장지의 풍경을 바라보고 사색한다. 미팅을 하고 업무를 마치면 돌아온다. 업무만 아니라면, 출장이 많은 평범한 직장인이다.


감상에 젖는 킬러를 묘사하다가도 건조하게 목표를 죽인다.

자연스럽게 업무를 수행한다.

다양한 살해 방법은 간략하고 자연스럽게 실행되어 언제 죽였는가 하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하드보일드 문체는 감정 묘사를 절제하고 켈러에게 향하는 감정의 이입은 살인이란 업무가 칼처럼 자른다.

건조한 살인 묘사는 히트맨 같은 게임처럼 살인을 멋지게 그리지도 않는다.

업무는 각 단편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기에 단순한 소재에 불과하다.


살인 샐러리맨의 출장을 동행하다 보면 살인도 의외의 유머도 있는 이 시리즈의 뒤가 궁금해진다.


작가 로런스 블록은 살인청부업자가 주인공인 이 '켈러' 시리즈 뿐 아니라 도둑이 주인공인 '버니 로데바' 시리즈, 무면허 사립 탐정이 주인공인 '매튜 스커더' 시리즈를 집필했다.

국내에는 '매튜 스커더' 시리즈와 '켈러'시리즈가 소개되었으니 '버니 로데바' 시리즈만 단행본으로 나오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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