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에 이르는 열두 가지 방법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

by 백수광부



배우 김갑수는 출연하는 배역마다 일찍 죽는 단명 전문 배우로 유명하다. 캐릭터의 사망으로 더 이상 출연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도, 회상 장면이 나올 때마다 출연료가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망도 마냥 손해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추리소설 속에서 사망한다면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을 사람은 누굴까.

시리즈의 주인공인 탐정은 당연하다. 조연으로 시리즈 내내 등장하는 캐릭터 역시 그보다는 적지만 고정 출연으로 출연료를 제법 받을 터이다.

희생자 A, B, C 등은 극 중 이른 퇴장을 해도 회상 덕분에 출연료를 챙길 기회가 생긴다.

본격 추리물에서 탐정이 용의자들을 모으고, 범인의 트릭을 밝힌다.

범인은 범행을 재연하고 희생자 A, B, C는 다시 쓰러진다.

회상 장면으로 출연료가 생기니 추리물이야말로 주연과 조연, 희생자 모두 출연료를 골고루 나눠 가질 수 있는 장르다.


%EC%B1%85%EA%B0%88%ED%94%BC00.jpg?type=w773 총상을 입고 쓰러진 희생자를 모사한 책갈피

여기 출연료를 골고루 나눠 가질 수 있는 연작 단편집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연작 단편집《명탐정의 규칙》이다.

경감 오가와라 반조가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의 주인공인 덴카이치 다이고로와 함께 본격 추리 소설의 12가지 규칙을 패러디해 그 부자연스러움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12개의 사건에 이어 〈명탐정의 최후 – 마지막 선택〉을 포함하면 13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오가와라는 잘못된 추리로 수사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 범인이 아닌 용의자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추리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찰 조연이다. 덴카이치 탐정은 낡아 빠진 양복에 더부룩한 머리, 연륜이 쌓인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진범을 밝히는 명탐정이다.

추리소설에서 수없이 등장하고 작가들이 변주한 인물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평범한 패러디는 아니다.


즉 나는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의 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명탐정 소설에는 터무니없는 논리를 펴는 형사가 반드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빈번히 등장한다. 그 멍청한 익살꾼을 연기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중략)
독자 여러분에게 묻겠다. 절대로 진실에 다가서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소설이 시작되는 즉시 진범과 진실을 알아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진범과 진실을 교묘히 피해 가야 한다. 한마디로 나는 항상 주인공인 덴카이치 탐정보다 한발 앞서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사건 해결로 이어질지도 모를 추리와 행동을 자제하면서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

《명탐정의 규칙》 中


오가와라 또는 덴카이치는 본격 추리 소설 12가지 규칙을 패러디한 사건들을 안내하면서 때로는 제4의 벽을 깨고 독자들에게 직접 이러한 규칙의 부자연스러움을 설파한다. 독자들에게 설명할 때만 배역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배역을 벗어날 때는 대화에서도 본격 추리 소설의 규칙을 비판한다.


우리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기서 입을 여는 것이 누구의 역할인지 모두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덴카이치를 쳐다봤다. 하지만 녀석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봐, 왜 이래. 명탐정이 제일 좋아하는 상황 아니야. 그 선언을 할 거 잖아. 하려면 빨리하라고.”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좋아. 뭐든 좋으니 빨리하게. 탐정 소설의 정해진 패턴대로 구태의연하고 뻔뻔스러운 선언을.”
나는 또 한 번 덴카이치에게 눈짓했다. 녀석은 부루퉁한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경강님, 그리고 여러분.”
모두의 시선이 탐정에게 집중됐다. 녀석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었지만 눈물을 꾹 참은 채 자포자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건 완벽한 밀실 살인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
이렇게 해서 밀실 선언이 내려졌다.

같은 서적 中


히가시노 게이고가 작중에서 12가지 규칙의 부자연스러움을 독자들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든 단편들은 황당하고 억지스러운 추리와 상황을 의도적으로 설정해, 독자는 기막히는 놀라운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오가와라와 덴카이치의 독설은 작가(히가시노 게이고)마저 피하지 못한다. 편의적이고 억지스러운 패러디를 독자 대신 비판한다.

황당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패러디는 단편마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 추리소설 애독자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웃음을 준다.


연작 중 〈여사원 온천 살인 사건 ― 두 시간 드라마의 미학〉은 일본의 두 시간짜리 추리 드라마의 규칙을 패러디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명탐정의 규칙》에서 가장 웃긴 이 작품은 명탐정 덴카이치의 놀라운 변모와 상상도 하지 못할 반전의 엔딩을 그려낸다. 국내에서는 다소 접하기 힘든 일본 추리 드라마의 속사정을 여지없이 까발리고 있다. ‘웬일인지 만들었다 하면 원작과 내용이 달라지고, 또 거의 대부분 원작보다 질이 떨어져’ 버린다는 투덜거림도 공감이 간다.

패러디를 통해 본격 추리 소설의 규칙을 비판하고 개연성을 지적하며 부자연스러움을 말할 수 있는 이는 추리 소설에 통달해야 한다. 추리 소설을 잘 아는 자만이 그것이 가능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 소설에 미친 자이고, 미친 자이기에 《명탐정의 규칙》의 규칙을 쓸 수 있었다.

본격 추리 소설 애독자도, 그렇지 않은 독자도 출연료를 받을 희생자들을 기리며, 이 황당한 사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덴카이치와 오가와라처럼 본격 추리 소설의 규칙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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