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강광은 웃지 않는다

by 백수광부


흥미로운 글을 보았다.

임진왜란 시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지를 가지고 조선을 방문한 왜인을 다룬 글이다.

대마도주의 가신인 그 왜인의 이름은 다치바나 야스히로며 우리 기록에는 귤강광으로 전해진다.


귤강광은 시종일관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연회에서는 그 당시 귀한 향신료인 후추를 고의로 뿌려놓고, 기생과 악공들이 황급히 주워 담는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통역에게 "너희 나라는 망했다. 기강이 이미 무너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고 배길 것이냐."는 오만방자한 말을 남겼다. 그의 발언은 조선의 불길한 미래를 예언하는 듯했다.


귤강광의 말대로 조선은 망했다. 왜인의 발언도 한국에 어울리는 말이라며 곱씹는 이까지 생겼다.


그런데 조선을 조롱한 귤강광은 어떻게 되었을까.


“귤강광도 사납고 거만하여 우리 나라 사람을 대하여 말할 적에는 문득 조롱하고 비난하였다. 이때 교리 유근(柳根)이 선위사(宣慰使)였고 예조 판서가 압연관(狎宴官)이었다. 귤강광이 고의로 연회 석상에서 호초(胡椒)를 흩어놓으니 기공(伎工)이 앞을 다투어 그것을 줍고 전혀 질서라고는 없었다. 귤강광이 객관에 돌아와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 나라의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거의 망하게 되었다."
하였다. 귤강광이 돌아갈 적에 그 서계(書契)에 답하되 ‘수로(水路)가 아득하여 사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수길이 크게 노하여 귤강광을 멸족하였는데 귤강광이 우리 나라에 편을 들어서 그 소청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의심해서였다.

http://sillok.history.go.kr/popup/viewer.do?id=knb_12009001_003&type=view&reSearchWords=&reSearchWords_ime=


이웃 나라를 조롱하던 사신은 조선의 앞날을 예견하기는커녕 제 몸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죽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으로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어 정작 일본의 정권이 바뀌었다.

기강이 무너진 나라, 조선은 323년이 지나서야 1910년에 한일병합조약으로 사라지게 된다.


문제의 연회가 일어난 후 뒤처리도 알아보자.


사헌부가 아뢰기를,


"예조(禮曹) 하마연(下馬宴) 때 일본국 사신들이 기공(妓工)들에게 준 면피(面皮)·단목(丹木)·호초(胡椒) 등을 주자 서로 빼앗아 그들에게 비웃음을 받았으니, 예조의 당상(堂上)을 추고하고 색낭청(色郞廳)을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102009_002


기생과 악공들의 관리 감독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자들은 벌을 받았다. 기강을 세운 기록이 남아 전해진다.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총독을 지낸 아베 노부유키가 한반도를 떠나며 남겼다는 발언도 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이 예언 같은 저주는 근거 없는 인터넷 상의 글이다. 기록을 살펴봐도 아베가 남긴 발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산에서 새벽에 제발 살려달라는 젊은 여성의 소리가 들렸다. 경찰은 강력 사건임을 직감해 출동했다.

그러나 용의자는 보이지 않고 산속에는 젊은 여성들이 탄 차량만이 보였다.

이들은 취업이 워낙 안 되어 산 정상에서 제발 살려달라고 소원을 빌었다고 실토했다

취업난이 낳은 기이하고도 슬픈 뉴스였다. 당시 유행하던 '헬조선'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뜻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젊은이들의 절규임을 시사하는 사건이었다.


귤강광의 옛 발언을 옳다고 인용하는 글과 아베 노부유키의 가짜 발언을 보고 이 뉴스가 떠올랐다.

이런 현실 앞에서 과거 일본인의 말로 현실을 재단하는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귤강광은 상석에 앉아 좋은 음식을 먹으며 귀한 후추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는 거만한 자였다.

기녀와 악공들의 추태를 구경하며 미개한 태도를 조롱했다. '너희 나라는 망했다'며 단정했다.

이해는 없고 방자하고 편견 가득한 시선만 있다.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는 패배주의적 전망을 담은 거짓 발언이지만, 더 문제는 이를 진실처럼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었다. 거짓 예언을 사람들은 조선 놈들이 그러면 그렇지라는 패배주의적 태도를 강화하는 도구로 소비했다.


오늘날 옛 일본인들의 발언을 끌어와 이 땅은 원래 이랬다며 말하는 태도는 귤강광의 편견과 다르지 않다.


이런 태도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현실에 대한 참여도, 치열한 비판도, 통렬한 반성도 없다. 성급히 판단하고 자신은 현실 밖에 서서 거만하게 멸시하는 시선만 있을 뿐이다. 그 세계에는 냉소와 자조만이 존재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 없이, 그저 비아냥거리며 우리는 안된다는 패배주의적 자조.


절규하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냉소와 자조가 아닌 응답이다.

냉소와 자조를 되풀이한다면 귤강광의 후추 뿌리기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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