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오후의 햇빛이 서서히 저물고 저녁이 피어오르는 그 시간. 이른 저녁을 먹은 나는 식당을 나섰다. 투명한 유리문을 당기고 밖으로 나서는데, 출입문 앞에 젊은 엄마와 유치원생 아이가 서있었다. 둘은 식당 앞에 전시된 메뉴판을 살피면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아들 뭐 먹을래?" 메뉴판의 수많은 목록을 훑어보던 엄마가 질문했고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한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 "사이다!"
순수한 아이의 대답에 자동으로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으며 그 장면을 곱씹었다. 처음엔 그저 아이의 대답이 너무 귀엽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반복의 반복을 할수록 무엇이 먹고 싶냐는 아이 엄마의 질문이 귓가에 맴돌다 가슴에 파묻혔다. 아마도 자신이 먹고 싶은 것보다 아이가 어떤 것이 먹고 싶은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우선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완벽한 타인인 내가 보아도 가슴이 아릴 만큼 알 수 있었다.
유난히 "엄마"라는 주제에 약해지는 것 같다. 영화나 소설을 볼 때도 엄마의 사랑이 나타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슬픈 장면이 아니라도 가슴이 먹먹할 때가 있다. 분명 어렸을 적에는 전혀 몰랐던 감정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먹먹함의 깊이는 깊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신과 함께의 후반부 장면(엄마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처음으로 울음이 터졌다. 사실 울음보다는 오열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내가 느끼는 이 애틋함의 크기만큼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만큼의 크기를 내가 인지를 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맞겠다. 지금 내가 머리로 알고 있는 '나를 향한 엄마의 사랑'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 평생을 가도 그 정확한 크기를 알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시간이 흘러 생각이 넓어지고 마음이 성장하는 만큼 눈을 뜨고, 눈을 뜬 만큼 엄마의 사랑, 그 크기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른한 주말 오후에 누워있더라면 엄마와 아빠는 천천히 장을 보러 나갈 준비를 한다.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나에게 꼭 빼먹지 않고 질문을 한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물으면 귀찮음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던 나는 대충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말한다. 단순히 뭐 사 올 거 있냐고 묻는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질문에는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계신지, 그 큰 마음을 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