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42. 굿 라이프 _최진철 지음
2018년 겨울. 너무 힘들어서 그냥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시간은 늘 부족하고, 앞날은 막막했습니다. 예민해진 아내와 말다툼이 많아졌고,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이런 제 자신이 한 없이 작고 보잘 것 없이 느껴졌습니다. 의지력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습니다. 그때는 정말이지 얼마 남지 않는 삶의 희망도 차라리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그 때 다짐했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죽을 만큼 노력이나 한번 해보자. 어차피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으니, 뭐라도 다시 해보자, 내 인생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이를 악물었습니다. 없는 시간을 더 쪼개가며 ‘죽을 만큼’ 열심히 살았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독서와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독서와 달리기는 스러져가는 저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극약처방이었습니다. 없는 살림에 적금을 붓듯,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살리기 위한 수단으로 ‘독서와 달리기’를 택한 이유는 2가지였습니다. 첫째, 독서와 달리기는 혼자서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누구를 만나는 것도 싫었습니다. 이미 바닥난 자존감으로 쪼그라들어버린 초라한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둘째, 독서와 달리기는 노력의 결과를 즉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 10페이지 읽기, 한번에 1km달리기와 같이 작은 목표를 세우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아주 작은 목표를 세우는 것도, 아주 작은 성취를 맛보는 것도 가능해보였기 때문입니다. 매일 도전과 포기를 오가는 격렬한 내적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서는 그나마 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달리기는 그야말로 시작부터 힘듦의 연속이었습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5km 완주’가 목표였습니다. 순간의 힘에 소개된 ‘소파에서 5km’를 보고 달리기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1분 동안 달리는 것도 숨이 차올라서 힘들었습니다. 조금씩 한계치를 끌어올려가며 달리는 시간과 거리를 늘려나갔습니다. 그렇게, 5분을, 10분을, 20분을 지나 30분을 연속으로 달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목표한 단계를 마쳤을 때 역시 뿌듯한 성취감 보다는 다음단계에 대한 걱정이 앞섰습니다. 책 읽기는 그런대로 할만 했지만, 달리기는 당장이라도 정지버튼을 누르고 싶은 런닝 머신처럼 금방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도전이었습니다. 저에게 달리기는 매 순간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지독한 싸움 같았습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달리기를 했습니다. 죽을 만큼 열심히 살아보니,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열심히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시간을 쪼개가며 살았던 그 때. 만약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만큼 열심히 살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정말 힘들었지만, 정말 행복했습니다.
이처럼 저에게 달리기는 극복해야할 고통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목표한 5km를 완주하고 나서는 한동안 달리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겨우 5km이겠지만, 저에게는 크나큰 도전이었고, 위대한 성취였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그 어렵고 힘들기만 한 달리기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근 바닷가를 달리면서 달리기를 다시 시작해보려 시도 해봤지만, 예전 같지 않은 실력에 좌절감만 맛봤습니다. 예전만큼 오래 달리지도, 빨리 달리지도 못했습니다. 바닷가 경치는 달리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보는 게 더 좋았습니다.
그러던 중 직장 동료들이 함께 달려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 지겨운 달리기를 또 하고 싶지 않았지만, 밤바다를 배경으로 달리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달려본 적이 없었기에, 호기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함께 모여 몸을 풀고, 사회적 거리를 충분히 유지하며 멀리 떨어져서 함께 달렸습니다.
남들보다 뒤쳐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선두에서 페이스를 조절하며 달리는 주자들이 생각보다 너무 천천히 달리는 게 아닙니까! 보기 좋게 따돌리고 앞서 나갈까 욕심이 들기도 했지만, 최근 달리기를 통 하지 않은 터라 그냥 묵묵히 따라가며 밤바다를 달렸습니다.
대략 20분 동안 3.8km를 달렸습니다. 짧지 않은 거리와 시간이었지만,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즐거웠습니다. 기록에 신경 쓰지 않고, 남들보다 빨리 달리려 애쓰지 않으니 달리기가 즐거웠습니다. 동료의 발소리, 숨소리를 들으며, 함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달리기는 철저히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달리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밤바다였지만, 그 분위기는 오히려 포근하고 따뜻했습니다. 동료들의 온기가 저를 감싸는 것만 같았습니다.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오는 달리기였습니다. 매번 꼴까닥 넘어갈 정도로 숨이 차올랐기에 헉헉거리는 제 숨소리 말고는 들리는 게 없었는데, 오늘은 파도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동료들이 착착 발맞추는 소리가, 그들의 숨소리가, 그리고 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행복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날의 달리기가 평소와 다른 것은 2가지였습니다. 함께, 그리고 느리게. 그 동안 달리기의 목적은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뛰는 것이었습니다. 제게 있어 달리기는 노력과 성장을 확인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실 ‘즐거운 달리기’는 아니었습니다. 달리는 동안 어제의 나와 끊임없이 비교를 했습니다. 달리기를 빼먹거나, 결과가 저조한 날에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혼자 했던 달리기는 재미가 아닌 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혼자 달리면서 이를 악물고, 약해진 의지를 다잡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의 악(樂)이 아닌 고통의 악(惡)으로 달렸습니다.
반면 함께 하는 달리기는 행복했습니다. 느리게 달리면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동료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어제보다 빨리 달려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니, 달리는 것 자체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이 사람들과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들보다 빨리 달리려 하지 않고, 함께 달리려 하면서 비교가 아닌 관계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그리고, 느리게 달리면서 행복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기술은 ‘비교’다. 반면에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술은 ‘관계’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비교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행복한 사람들은 관계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 - 굿라이프 (최진철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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