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간의 세계일주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세계일주~!
그저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입니다. (해본 결과, 실제로 매 순간 설렙니다:) 각박하기로 소문난 헬조선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죠. 어느 누구에게나 세계 일주에 빠져드는 순간이 존재합니다.
저의 경우,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읽고 나서였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모비 빅'처럼 위대한 소설은 아니지만, '식스 센스' 급 반전은 또 다른 방식으로 많은 독자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저는 마침내 세계 일주를 시작했습니다.
소설을 오마주하고 자, 소설처럼 지구 서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는 루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현실적인 이유를 감안하면, 한국에서는 서쪽 방향을 대다수 선택하죠.
소설에서 여행 방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살짝 이과적 내용과 연관이 되어서, 마음 편히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뒤통수 맞은 느낌이죠.
서에서 동으로 여행만 한 것이 전부인데, 갑자기 하루를 벌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아동용으로 나오기 때문에 구체적인 부연 설명도 나와 있지 않죠. 그 결과..
아.. 그런가 보다..
주인공은 지구의 경도 1도씩 넘을 때마다 4분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원론적으로 시간은 태양 위치에 의해 정해집니다. 예를 들어, 해가 바로 머리 위에 있으면, 정오라고 하죠. 만약 충분히 멀리 떨어진 A와 B 지역의 태양 위치를 동시에 측정한다면, 당연히 서로 다를 것입니다. 두 지역의 시간 또한 다르다는 의미이죠.
만약 A에서 B 지역으로 이동한다면, 시간은 어떻게 변화할까요??
A 지역의 시간에서 경도 1도씩 이동할 때마다 4분을 조정해 주면 B 지역에 맞는 시간이 됩니다.
오후 12시 우리가 동쪽인 B를 향해 3시간 동안 이동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B의 시간은 오후 12시 + 이동 시간 3시간 ± α (경도에 따른 시간 조정)이 됩니다.
그러면 알파는 플러스일까, 마이너스일까?
우리가 동쪽 B로 이동하는 사이 해는 반대편인 서쪽으로 점점 움직입니다. 즉, B에 도착한 3시(12시 + 이동시간 3시간), 태양은 A에 있을 때보다 더욱 서쪽에 있게 됩니다.
해가 서쪽에 있다면, 곧 석양이 지며, 하루가 끝난다는 말. 그런 만큼, 동쪽 B에서는 A 지역보다 플러스 α를 해주면 됩니다.
소설 속에서 나온 말로 표현하자면, 동쪽으로 경도 1도씩 이동할 때마다 4분의 시간이 단축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도당 4분씩 시계의 시간을 앞당겨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로서는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시간을 α만큼 건너뛰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80일이 지나 런던으로 돌아와서 내기에 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79일 만에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동안 쉬운 소설은 갑자기 어려워집니다. 설명이 단 한 줄이고, 그것마저 불충분하기 때문이죠.
일행은 계속 동쪽으로 여행했던 만큼, 시간을 더해야 하는 게 맞는데, 오히려 1일을 빼야 하다니......
좀 이상하죠? 일단 패스!
경도 1도마다 조정하기에는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요즘은 보통 경도 15도 당 1시간씩 시간 보정을 합니다. 그래서 한국은 서울이 지나는 127도를 기준으로 표준시를 사용하면 좋지만, 국제 관례상 동경 135도 기준을 사용하죠.
일부 사람들은 일제가 정한 동경 135도 시간대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너무 일본이 싫다는 이유로 국제적인 현실과 같은 큰 그림은 전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동경 135도가 아니라면, 중국과 같은 동경 120도를 써야 하지만, 독도까지 고려하면 당연히 동경 135도를 사용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1시간 주기의 시간대를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례일 뿐, 국제법은 아니기 때문이죠.
보통 국제 사회에서 독고다이 성향을 가진 국가들이 시간대마저 독고다이이 경우가 꽤 입습니다. 자기만의 정체성만큼은 확고한 인도는 한국과 3시간 반 시차가 있죠. 인도와 사이가 나쁜 네팔은 인도와 같은 시간대 사용을 의도적으로 피하다 보니, 한국과 3시간 15분 차이 납니다. 어차피 폐쇄적인 국가인 만큼, 큰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독고다이 국가 이란도 한국과 30분 단위의 차이가 납니다. 독고다이이자 독보적 크레이지인 북한도 원래는 한국과 30분 차이가 나는 시간대를 사용했지만, 무슨 마음인지 최근 한국과 시간을 통일하기도 했죠.
그러면 경도의 시작은 어디일까? 바로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입니다. 당시 대영제국의 전성기이었던 만큼, 라이벌 프랑스만 빼고는 모두 깨갱하며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홀로 파리를 지나는 경도를 고집했지만, 오히려 프랑스만 혼란스러웠죠.
사실 150년 전만 하더라도, 시간대라는 게 없었습니다. 워낙 느린 사회이었고, 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굳이 시간대가 있을 필요가 없었죠.
설사 다른 곳으로 이동했어도, 그 동네 시계에 맞춰 생활하면 충분했습니다. 사실 그것마저 정확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컸죠. 하지만 철도가 개통되자, 동네마다 다른 시간은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4시에 런던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플리머스에 도착했더니, 현지 시간도 4시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으로, 그 유명한 상대성 법칙에 의하면 빛보다 빠른 물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딱 봐도 기차는 빛보다 엄청 느립니다. 이러한 혼란을 멈추고자, 영국 철도는 런던 근처에 있는 그리니치 시간을 표준 시간으로 선택했습니다.
동네 광장에 있는 시계의 시간을 사용하지 않고, 그 동네를 지나는 철도는 무조건 런던의 그리니치 시간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철도 회사를 넘어, 사회 전체적으로, 국제적으로 이러한 시간 체계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956년이 돼서야 네팔이 마지막으로 채택했을 정도.
소설의 배경은 1872년입니다. 경도를 15도씩 나눠 시간을 조정하는 체계는 아직 생기지 않았지만, 위치에 따라 시간을 조정을 해줘야 한다는 상식쯤은 알았던 시대이죠. 2만 파운드가 걸린 중요한 내기이었던 만큼, 정해진 시간에 기차, 배를 타고자 현지 시간에 시계를 잘 맞췄을 것입니다.
게다가 주인공은 킹스맨에서 익히 보았던 영국 신사.
그는 하인이 면도용 물의 온도로 규칙으로 정한 30도 대신 29도에 맞춰 가져오자 곧바로 해고할 만큼 기계적인 사람입니다. 빈틈없었던 그는 왜 1일을 착각하는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을까?
대신 변호를 해주자면..
사실 우리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때가 태반입니다. 오늘이 목요일쯤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화요일 밖에 안 된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출근한 기억은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나 주인공처럼 세계 일주를 직접 해보니, 더욱 날짜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호텔 체크아웃 때문에 날짜만 신경 쓸 뿐, 무슨 요일인지 잊고는 합니다. 백수의 1주일은, '월, 화, 그, 딴, 거, X, 까'로 구성되어 있으니까요.
세계 시간의 기준점,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동경 15도씩 이동할수록 1시간 빠른 시간대를 이용하고, 서쪽으로는 1시간씩 느려진다고 살펴보았죠? 근데 경도 180도 되는 태평양 부근에서 이 시간대가 충돌합니다.
180도 지역은 그리니치 동쪽 기준으로 12시간 빠른 시간대이지만, 동시에 서쪽 기준으로는 12시간이 느린 시간대이기 때문입니다. 3차원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현상이죠. 소설처럼 주인공 일행은 12월 21일 런던에 도착하지만, 정작 런던 현지 시간은 12월 20일이라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미 13세기 후반 아랍 학자가 이러한 모순 발생을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최초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 탐험대에 의해, 실제로 모순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당연히 1522년 7월 9일인 줄 알았지만, 도착지 Cape Verde의 시간은 7월 10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지 아무도 몰라서 그저 황당하기만 했습니다. 스페인 주재 베네치아 대사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오랜 해양 강대국만의 연륜...
바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날짜 변경선을 도입합니다.
경도 180도 부근에 가상의 선을 설정하여, 이 선을 넘으면 1일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미국 방향으로 넘어가면, 1일을 빼주고, 반대이면 1일을 더해주죠. 날짜가 바뀌면 일생 생활에 큰 지장이 있기 때문에, 날짜 변경선은 사람이 살지 않은 섬 사이를 지그재그 식으로 통과합니다.
그래서 상당히 지저분합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새해를 먼저 맞이하기 위해 억지로 선을 설정하다 보니, 더욱 개판의 선이 되었죠.
쥘 베른이 책을 쓰던 당시, 날짜 변경선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소설에서 보듯이 당시 세계 일주는 대단히 위험했습니다. 또한 현재 날짜 변경선이 지나가는 태평양을 건너는 사람은 거의 없었죠.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 혹은 신대륙을 오고 가는 사람이 대다수이었고, 아시아와 북미 간 교통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날짜 변경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아직 시급하지 않았습니다. 태평양을 건너는 실무자들 사이에서나 암묵적인 룰이 있었을 뿐이죠. 소설 출판 후 10여 년 후에나 공론화되었죠. 그 결과, 나라마다, 지역마다 고유의 날짜 변경선을 사용했습니다.
현재 날짜 변경선 기준으로 필리핀은 멕시코보다 하루 빠릅니다. 하지만 멕시코와 함께 스페인 제국의 일부이었던 과거에는 제국 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멕시코와 동일한 날짜를 사용했습니다. 즉, 날짜 변경선의 오른쪽에 필리핀을 둔 것이죠.
현재 시간대로의 이동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후, 동남아와 무역 활동이 증가하고 나서였습니다. 한때 러시아 땅이었던 알래스카도 원래는 날짜 변경선 왼쪽에 있었습니다. 역시나 러시아 본토와 같은 날짜를 사용하기 위해서이죠.
하지만 러시아가 헐값에 알래스카를 팔 자, 그럴 이유가 없어졌고 날짜 변경선을 현재로 변경했습니다. 근데 이때는 고려할 변수가 꽤 많았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답게 오차가 심한 율리우스력을 사용해서 현재의 달력을 사용하는 유럽과 12일 차이(링크 참조)가 났습니다. 크리스마스도 유럽 기준 1월에 보냈을 정도. 하지만 알래스카는 하루가 늦은 미국 땅에 속하므로 11일을 점프한 것으로 최종 정리했습니다.
1867년 10월 7일 정오 ㅡ> 10월 18일 정오로 점프~!
주인공 일행은 서쪽 반대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여행할 수도 있었지만, 우연히 동쪽을 향했고, 하루를 벌었습니다. "시간은 금"이라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 2만 파운드의 상금을 탔고, 더욱 중요한 것은 미모로 주위에 소문이 자자한 아우다 부인과 결혼에 성공하기도 하죠.
역시나 될 놈은 된다..ㅜ
이미 대단히 부자이었던 주인공과 달리 대한민국 대표적 흙수저임에도 저는 현실적인 여건상 서쪽으로 돌았습니다. 때문에 마지막 목적지인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강제로 하루를 더해야 했습니다.
백수에게 하루하루가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데, 그나마 가진 유일한 재산인 시간마저 태평양에 버리고 와야 하더군요.
제길, 안될 놈은 시간까지 뺏기네..
혹시라도 세계 일주를 하실 분이 있다면, 반드시 동쪽 방향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예비 거지 신분이 되니, 한 가지 만큼 확실히 깨닫습니다. 부모님이 영주권자인 덕분에 수없이 미국을 왕복했지만,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사실입니다.
역시, 시간은 금이라는 것..
헬조선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여러분! 그럼에도 알차게, 행복하게, 소중하게 삶을 살아갑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니까요!
또 모르죠. 혹시나 세계 일주를 하고 있을지..
P.S. 사실상 소설이나 가능한 이야기. 미국에서 잠깐이라도 날짜를 확인했다면, 날짜 변경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주인공 일행이 생각했던 날짜와 틀리다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완벽했던 주인공은 웬일인지 날짜만큼은 스스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충실한 하인은 물려받은 시계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강한 나머지, 여행 내내 시계 한번 맞추지 않고 런던 시간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설정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