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이 되어야 내가 젊다는 걸 받아들였다
나는 당신에게 줄 젊음이 없어요
대학생 때 이런 제목의 에세이를 썼다. 유튜버에서 솔로 가수로 데뷔한 트로이 시반의 신곡 ‘유스’가 유행하던 때였다.
트로이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나의 젊음은 그대의 것’이라고 노래하던 그 시절, 나는 내가 가진 젊음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결론을 내렸다.
‘나는 세상이 말하는 젊은이랑 다른데.’
아무도 나를 늙은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늘 또래들과 나는 다른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젊음을 과시하며 두려움 없이 앞날을 개척하기에는 너무 부끄럼이 많았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사고를 확장시키기에는 나만의 고집이 참 셌다. 유행에 따라 패션을 바꾸지도 않았고, 남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일부러 대중문화를 찾아 헤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나의 친구들에게 참 감사할 정도로 나는 나의 세계에만 갇혀있었다. 다른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관심을 둘 때.
너무 소중해서 그랬어요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는 보편적인 젊은이랑 다른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 치고는 또래 청년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감히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가 생활이나 도전, 취미, 여행 등의 흔적을 SNS에서 만나더라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청춘의 기록을 보며 부러워하고 그렇지 못한 나의 삶을 한심하게 여겼다.
그때는 그런 젊음만이 참 소중해 보였다. 세상이 바라는 청춘의 모습, 기성세대와는 달리 톡톡 튀고 발랄한 성격과 행동양식으로 세상을 발칙하게 뒤집는 모습이 젊음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본질에 완벽하게 다가갈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멀리서 지켜보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젊음의 기록은 그들만큼이나 젊지 않을게 뻔했으니까. 게다가 정적이고, 무뚝뚝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시들시들해지는 나의 젊음을 누가 보고 싶어 할까? 미디어에서 그리는 젊음은 생긋생긋 웃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는 모습뿐인데.
나이가 아깝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다이어트 해.’
‘조금이라도 젊을 때 예뻐 보여야지.’
‘늙어서 나잇값 못하고 꾸며봤자 어린애들만 못해.’
생각해보면 젊음을 유난히 중요시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남들만큼 꾸미지 않고 잘 웃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젊음에서 배제시키려는 사람들도 참 많았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나이가 적다는 것만으로는 청년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평균이나 그보다 못한 몸매에 하늘하늘한 옷을 걸치고, 발을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아프더라도 무조건 구두를 신고, 허튼소리를 들어도 웃음과 함께 유연하게 넘겨야만 겨우 ‘요즘 애들’에 속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나이가 아깝고, 청춘을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국 회사에 취직하려면 무조건 영어 점수를 갖춰야 하는 것처럼 황당한 소리였다. 나이가 어리면 자동으로 젊은이의 삶을 살게 되는 것 아닌가? 젊음에도 자격요건이 있다니?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젊음을 되찾았다
지금이라도 나는 남들에게 순순히 내주었던, 그리고 남들이 뺏아갔던 젊음을 되찾고 마음껏 누릴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남들은 내가 ‘요즘 젊은 애들’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수십 개씩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만이 젊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깨달은 젊은이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 지금 당장 책임지고 지켜야 할 유일한 존재는 자기 자신뿐이다.
- 그래서 당장 돈이 되는 것보다 ‘나를 나로서 살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찾는다.
- 나의 마음이 다치지 않는 한에서 마음껏 도전하고, 실패하고, 이를 반복한다.
외모나 체형, 스펙이나 패션으로만 젊음이 재단되는 건 아니다. 회사 대신 도서관을 들락거리고 커피 대신 공무원 인강 교재를 짊어지는 삶에도 젊음은 존재한다. 나는 이 세상의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젊음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수많은 젊음 중, 나는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고 이를 기록하는 것으로 나의 젊음을 되찾으려 한다.
도전의 기록. 이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젊다는 걸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