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빨간 잠옷과 진주목걸이, 그리고 조작된 자긍심
이 글은 강신주의 베스트셀러 『감정수업』을 길잡이 삼아, 스피노자의 48가지 감정중 10가지 감정을 소설과 함께 다시 읽어 내려가는 인문학 연재입니다.
연인 장마르크의 익숙한 시선 속에서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공포를 느낀 샹탈. 장마르크는 그녀의 무너진 자긍심을 세워주기 위해 위험한 연극을 시작합니다. 익명의 숭배자, '시라노'가 되어 그녀에게 찬양의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장마르크가 보낸 가짜 편지들은 샹탈에게 마법 같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지적이고 관능적인 숭배의 언어로 가득 찬 편지들은, 샹탈이 스스로 잊고 있던 매력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췄습니다.
샹탈은 편지가 묘사하는 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조립하기 시작했습니다. 편지에서 진주목걸이가 칭송되자, 평소 "너무 화려하다"며 피하던 목걸이를 보란 듯이 걸고 외출했습니다.
심지어 '아름다운 빨간 당신'이라는 구절에 이끌려, 평소라면 경멸했을 붉은색 잠옷을 사 입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쇼핑이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규정(편지)에 맞춰 자신의 취향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뜯어고치는 재구성이었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욕망하는 대로, 그녀는 기꺼이 변해갔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는 놀랍게도 자긍심의 회복이었습니다. 샹탈은 익명의 편지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긍정적인 모습(보석, 붉은 잠옷)을 확인했고, 이로 인해 엄청난 활력과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의 작동 방식입니다.
"외부적 자극(편지)을 통해 내면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고 기쁨을 얻는 것."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회복에는 치명적인 역설이 숨어 있었습니다. 편지를 쓴 장마르크 본인조차 예상치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입니다.
그는 편지 속 묘사대로 변해가는 샹탈을 훔쳐보며, 과거와는 다른 색깔의 에로티시즘과 사랑을 느꼈습니다.
장마르크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해 낸 가상의 숭배자(시라노)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샹탈이 내가 아닌, 내 편지 속의 남자에게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실제의 '샹탈'이 아니라, 편지가 만들어낸 '이미지로서의 샹탈'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나는 그녀를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복제품, 원본 없는 이미지인 '시뮬라크르(Simulacra)'로 변모시켰다."
타인의 시선(비록 가짜일지라도)이 개인의 실체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현실을 집어삼키는 순간이었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결국 샹탈은 편지의 발신인이 장마르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녀가 느낀 것은 고마움이 아니라 끔찍한 모멸감이었습니다. 자신의 자긍심이 연인의 조작된 각본 놀음이었다니. 그녀는 장마르크가 자신의 내면을 훔쳐보고 조종했다고 느꼈습니다. 샹탈은 분노와 함께 런던으로 떠나버립니다.
이별이라는 차가운 현실 앞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가짜 편지놀음 따위보다 서로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절실한지를.
장마르크는 런던으로 그녀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물 속에서 재회합니다. 거기서 샹탈은 장마르크에게 기묘한 약속을 하나 합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왜 그녀는 불을 켜 놓겠다고 했을까요? 1부에서 샹탈이 느꼈던 공포를 기억하십니까?
"남들이 나를 보지 않으면 나는 사라진다."
"불을 켜 놓겠다"는 말은, 당신이 잠든 순간에도 나는 당신을 바라보겠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내 시선 밖으로 사라져 투명인간이 되지 않도록, 내가 영원히 당신의 거울이 되어주겠다는 숭고한 서약인 것입니다.
쿤데라는 왜 이렇게까지 '시선'에 집착했을까요? 왜 사랑조차 '본다'는 행위로 증명되어야 했을까요?
사실 이 소설 속 공포는 쿤데라 자신이 평생 싸워야 했던 어떤 감시의 기억과 맞닿아 있습니다.
(내일 3부에서 계속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어떤 거울입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춰주는 맑은 거울입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를 왜곡시키는 '요술 거울'입니까?
당신은 연인을 사랑합니까, 아니면 당신이 머릿속으로 만든 '연인의 이미지'를 사랑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