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이어진 비가 멈추고, 이른 아침 창밖 하늘은 밝은 회색빛으로 고요하게 피어 있다. 바람 소리 사이로 새들의 노래가 스며든다. 그 소리가 내 마음을 슬며시 일으킨다. 침대에 걸터앉아 무릎을 모으고, 자연스레 손을 모은다. 오늘도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조용히 기도를 올린다. 어떤 하루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다짐한다.
아침의 정적 속, 내 기도에 스며드는 또 하나의 소리. 엄마의 책 읽는 목소리다. 더듬더듬, 때로는 또박또박, 어떤 단어는 힘 있게, 어떤 문장은 엉뚱하게 튕긴다. 이젠 TV보다 먼저 책을 집어 드는 엄마. 도톰한 돋보기 너머로 한 글자씩 짚어가며 읽는 그 모습은 경건하고 아름답다.
엄마는 여전히 ‘했어요’를 ‘했써요’로 읽는다. 아무리 고쳐드려도, 그 말만큼은 고집스럽게 원래대로 읽으신다. 나는 그 고집이, 그 투박한 꾸준함이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주방으로 나간다. 냉동실에서 고등어를 꺼낸다. 아침 식사에 단백질을 보태려는 생각에. 다시 내 방으로 들어오다 거실의 엄마를 힐끗 보니 책을 덮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한다.
“글자가 안 돼. 이것 좀 알려줘 봐.”
중간중간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문장이 이상하다며 답답해하신다. 옆에 다가가 앉는다. “엄마, 지금 이렇게 하시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예요. 정말 많이 발전하셨어요. 모르는 거 당연해요.” 다독이며 함께 책을 펼친다.
요즘 엄마는 모르는 글자를 기억했다가 ‘이거’라며 손으로 짚어 물으신다. 어느 날은 몇 페이지에 있었던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손가락으로 무릎 위에 조심스레 써 보이신다.
한글 공부를 권했을 땐,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온다며 고개를 저으셨다. 그러던 엄마가 어느 날 책을 펼쳐 묵독을 시작하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은 소리로 단어들을 읽기 시작하셨다. 나는 “엄마, 한 페이지만 반복해서 읽어봐요. 같은 단어들이 계속 나올 거예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아파서, 더 챙기지 못했다. 엄마는 묻고 싶어도 말을 아끼셨을 것이다.
요즘은 새벽마다 책을 읽으신다. 예전엔 ‘글씨가 안 보인다’고 하셨는데, 이젠 ‘모르는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신다. 나는 안보이는 글자가 더 이상 없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엄마의 읽고자 하는 마음이, 그 순수한 갈망이 기특하고 존경스럽다.
요즘 엄마는 질문이 많아졌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글자를 읽고 싶어 하신다. 배달 음식 봉투에 붙은 영수증도 한참을 들여다보신다. “여기 써 있는 대로 주문한 거야?”라며 묻는다. 약 봉투의 글씨를 읽으며 “이게 혈압약이야?”라고 물으신다.
그 호기심이 참 사랑스럽다. 그 지치지 않는 배움의 자세가 존경스럽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좀 더 친절한 딸이 되자고. 지금 이 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 안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행운인가.
사실, 나도 엄마처럼 여든여섯까지 살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산다 해도 엄마처럼 성실하고 근기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감히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한다. 친딸이니까, 조금만 닮게 해달라고. 엄마와 이렇게 책 읽는 시간을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