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삶 속에 스며드는 법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3부 인생은 짧지만 잘살아낸 삶의 기억은 영원하다.


안목

96. 알맹이 잇는 명성을 얻었다면 유지하기는 쉽다.

명성을 얻고 유지하라. 이것은 유명해지면 얻을 수 있는 권리이다. 하지만 명성을 얻기는 무척 어렵다. 한번 명성을 얻고 나면, 거기에는 많은 의무가 따른다. 더 많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친구야, 7시 40분까지 갈게.”

오늘 아침에도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가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정을 알기에, 등굣길마다 차를 함께 타고 가자며 먼저 연락해오는 친구다. 올해 들어 그가 내게 건네는 도움은 지속적이고도 깊다. 요즘 나는 항암을 받지 않아 미안한 마음에 몇 번이고 거절해 보지만, 그럴 때마다 “아픈 사람이 무슨 소리야” 하며 집 앞에 차를 대기시킨다. 가족들조차 내가 학교에 간다고 하면 “몸이 괜찮으니까 갔구나”라고 말할 뿐이다. 그 친구처럼 아픈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매번 감동한다.

차가 도착하기 전 나는 간식이라도 준비해 놓으려 한다. 작은 것이라도 준비해 두면 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친구는 늘 자기가 전화할 때까지 집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한다. 기다리면서 힘들까 봐, 또 한 번 나를 배려한다. 차문을 열어주며 “이렇게 의전하면 되나?” 하고 농담을 건네는 친구에게 웃음이 난다. 치료 후 건강이 회복되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꼭 보답하고 싶다. 하루 일과를 들어보면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열심히 사는 사람인데도 그 속에 나를 이렇게 끼워 넣어 준다.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고맙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마음을 배우고 실천하고 싶다.


학교에 도착해 교실에 들어서면 동기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는다.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과일이나 쿠키, 커피를 나눈다. 집에서는 몸에 좋지 않다고 삼가던 간식들이 여기서는 자연스레 손에 잡힌다. 가끔은 ‘지금 내가 이렇게 먹고,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때, 최고령 동기님이 허리에 보조벨트를 두르고 오늘 수업할 책을 품에 안은 채 힘겹게 들어오신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내 친구는 문 앞으로 나가 그분을 맞이한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하며 네 권의 전공책을 받아들고,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첫 수업책을 가장 위에 올려 두는 그의 작은 선행을 우연히 목격하고, 또 한 번 마음이 움직인다.


교실 안에는 허리가 아픈 팔십세 어르신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와 가족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쁘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도 정신이 없다. 그런데 내 친구는 학생회장이기도 하다. 확실히 더 많이, 더 넓은 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보통 학생들과 다르다. 자연스럽게 약한 사람의 자리와 시선을 함께 향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상황들에 대한 배려와 기여가 남다르다.

내가 겪어 온 삶의 시간 속에서도 그런 사람들은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때 곁에 와서 아무 조건 없이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 그때는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이야말로 ‘알맹이 있는 명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명성이란 TV에 나오는 유명세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묻어나는 인격과 태도의 이름이다.

친구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몸이 회복되면, 다시 내 삶이 조금 더 넉넉해지면,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배려를 습관처럼 실천하는 사람. 작은 것들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하는 사람.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하다’가 아니라 ‘믿을 만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침의 짧은 동행과 교실 안의 작은 장면들은 내게 많은 것을 알려 준다. 명성은 단지 얻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키워 가는 것이라는 사실. 내세우지 않아도 스며드는 향기 같은 것이라는 사실. 그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몸이 아픈 날에도, 마음이 힘든 날에도, 이렇게 작은 감동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대단한 명성은 아닐지라도, 제3자의 입장에서 친구를 바라볼 때,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내세우지 않는 그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명성보다 더 귀한 것은, 아마도 이런 태도가 아닐까. 나도 언젠가 그 길을 걸을 수 있기를, 오늘도 마음속으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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