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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를 먹으며

by 또 다른세상

병원에서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 고소한 간장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졌다. 식탁 위로 먼저 눈이 갔다. 노란 쟁반 위에는 호두, 아몬드, 땅콩, 해바라기씨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견과류 볶아 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큰언니가 주방에서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양푼 하나를 들고 식탁으로 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뭐 맛있는 거 했어?”
양푼 안에는 잡채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지난번에 네가 먹고 싶어하던 것 같아서,” 언니가 말했다.

아, 내가 그런 말을 했었구나.


잡채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어 보였다. 청경채, 맛살, 버섯, 당근, 양파, 파프리카…. 냉장고 속 재료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추석 명절이 끝난 후 따끈한 잡채가 먹고 싶다고 했던 내 말을 기억해준 것이다. 위에 소복이 뿌려진 참깨가루가 고소한 향을 더했다.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친정엄마와 요양사님이 산책을 마치고 들어오셨다. 요즘 엄마는 휠체어에서 혼자 일어나지 못하신다. 나는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없어, 언니가 두 손으로 엄마를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그 모습을 보면 늘 걱정이 앞선다. ‘며칠 후 엄마와 나만 있을 때는 어떻게 하지?’ 나는 저렇게 해드릴 수 없는데….


엄마는 집안에 가득한 고소한 냄새를 맡고 물으신다.
“뭐 맛있는 거 했어?”
“어서 드세요.” 언니가 웃으며 대답한다.


엄마와 요양사님은 맛있다며 금세 한 젓가락, 두 젓가락 잡채를 드셨다. 나도 옆에 앉아 쫄깃한 당면과 아삭한 채소의 식감을 느끼며 먹었다. 배가 부른데도 한 그릇을 더 떠먹었다. 병원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해놓은 언니의 정성이 마음을 울렸다.


언니는 요양사님께 남편분 점심으로 드리라며 잡채를 한 통 싸드렸다. 엄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셨다. 오랜만에 밝은 얼굴이었다.


요양사님이 퇴근 전 물었다.
“이제 뭐 하실 거예요?”
“성경책 읽어야지.” 엄마가 대답하신다.
“요즘은 큰애가 옆에서 모르는 글씨 알려줘서 잘 배우고 있어.”


요양사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성경을 듣는 건 어떠세요?”
“듣는 건 잘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언니가 대신 말한다.

요즘 엄마는 낮에도 자주 졸곤 하신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지만, 시간이 되면 언니와 나란히 앉아 성경을 읽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 큰애가 이렇게 차분하게 읽는 법을 가르쳐 주니까 읽는 거야 …”
엄마가 요양사님께 말씀하신다.


“원래는 글을 하나도 몰랐는데, 막내가 한글 알려준다고 책을 많이도 사다줬어.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읽을 수 있어.”


엄마는 막내가 알려줬다고 했지만, 사실은 스스로 깨우치신 것이다. 처음엔 글씨를 ‘그렸다’. 그다음에는 받침 없는 글자를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다. 발이 퉁퉁 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글 공부를 하셨다. 문맹으로 살아온 세월이 한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3년을 꾸준히 이어오더니, 이제는 성경책을 척척 읽어 내려가신다.
노인이 이렇게도 배울 수 있는데, 세상 어떤 공부가 어렵다 말할 수 있을까.


큰언니는 음식으로 사랑을,
엄마는 인내와 끈기로 삶을,
그리고 나는 그 사랑을 글로 담아내며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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