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4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가장 위대한 일이다.
관계
125. 남의 흠이나 들춰내 자기 흠을 덮으려 하지 말자.
녹색 책이 되지 말자. 남의 치욕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은 자기 명성이 망가졌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흠이 지워지지 않으면, 남의 흠으로 자기 흠을 덮으려고 한다. 아니면 그것으로 위로를 삼는데,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위로일 뿐이다.
남의 흠이나 들춰내 자기 흠을 덮으려 하지 말자. 남의 치욕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은 이미 내 마음이 상처받았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흠이 지워지지 않으면 남의 흠으로 덮으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것으로 위로를 삼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위로일 뿐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다. 남의 허물을 보기보다 진심으로 안부를 묻는 일에 마음을 쓰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던 날,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치료 중인 나의 상황과 컨디션을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따뜻한 말이었다. “저녁에 얼굴 보고 싶다.” 그 한마디가 가을 햇살처럼 마음을 덮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친구를 만나러 역으로 향했다. 또 다른 친구도 몇 시 몇 분 도착 예정이라며 연락을 주었다. 십오 분 먼저 도착한 나는 역 주변을 걸으며 맛집을 살폈다. 출퇴근만 하느라 스쳐 지나던 거리였는데,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간판 불빛이 반짝이고, 퇴근길 사람들의 얼굴엔 하루의 피곤함과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돈가스집, 햄버거집, 고기집, 국수집이 줄지어 있었지만, 오늘은 왠지 따뜻한 국물이 끌렸다. 낮부터 부는 바람이 제법 차가워져 국수 한 그릇 생각이 간절했다. 국물의 온도처럼, 친구와의 대화도 내 마음을 덥혀주리라.
지하철 계단을 내려다보며 친구를 기다렸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각자의 옷차림은 가을 단풍처럼 제각각이었다. 반바지를 입은 사람, 코트를 입은 사람,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까지. 그들 사이에서 나는 두꺼운 외투의 단추를 다시 잠갔다. 아직은 치료 후유증이 남아 몸이 예민했다. 사람들 틈을 바라보며 ‘짠!’ 하고 나타날 친구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때, 유명서점 쇼핑봉투를 든 그녀가 계단을 올라왔다. “여기, 여기!” 손을 흔들자 그녀는 가을하늘 같은 미소로 다가와 나를 안았다. “아픈 데는 괜찮아?” 어깨를 토닥이는 손끝이 따뜻했다. 짧은 인사 속에 오랜 우정이 녹아 있었다.
우리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를 먹으러 걸었다. 식당 안은 배달 주문과 손님들로 붐볐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모습이 생동감 넘쳤다. 바쁜 공간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배려가 느껴졌다. 잔치국수를 주문하고 나자, 김이 오른 국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 따뜻한 냄새는 오랜만에 마음의 문을 여는 신호 같았다.
국수를 한 젓가락 삼키자 친구가 조심스레 회사를 이야기했다. 최근 겪은 일이었다. 예약해둔 책이 새 책이 아니라며 언성을 높인 고객이 있었다고 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고객은 듣지 않았다. “창고에 있는 물건이 입고되어야 한다”고 하자, 그는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는 남자 직원도 있었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친구는 속으로 간절히 도움을 바랐다고 했다. 그런데 매대 뒤에 있던 동료가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힘들었다고 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외면하는 사람의 태도는 멀리서 욕하는 사람보다 더 차갑다. 순간, 쌓였던 신뢰가 무너졌다는 말을 들으며 나도 가슴이 먹먹했다. 결국 보안요원이 와서야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했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사람은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도 잊는다. 고객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상대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직원은 그 쓰레기를 받아내며 하루를 버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은 기쁨과 고통이 공존한다. 어느 날은 미소로 하루가 가볍고, 또 어느 날은 한 마디 말로 마음이 무너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맞이하고, 이해하려 애쓴다.
오늘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고객이 진짜 원한 것은 ‘새 책’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 존중받는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흠을 들추며 자신의 불편함을 덮으려는 사람은 결국 더 깊은 상처를 만든다. 친구는 동료의 행동에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 동료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숨고 싶었고, 누군가는 싸워야 했다. 그 선택은 옳고 그름으로 단정할 수 없는 문제다. 다만, 그 순간 손을 내밀어 준 사람만이 진정한 동료로 남는다.
밖으로 나오니 찬 바람이 불었다. 가을의 끝자락, 길가의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노란 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계절처럼 변한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면 관계는 쉽게 식어버리고, 작은 상처가 남는다. 하지만 그 상처를 감싸주는 손길 하나면 다시 따뜻해질 수도 있다.
세상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누구의 흠을 들춰 위로받기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의 상처를 덮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남의 허물을 가리며 자신을 세우려 하지 말자. 국수 한 그릇을 나누며 웃었던 오늘처럼, 사람 사이의 온기로 나를 지키는 일. 그것이 내가 오늘 다시 배우는 인간다움의 시작이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내 흠을 덮어줄 때, 나는 그 온기를 기억하며 다시 누군가의 어깨를 감싸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