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4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가장 위대한 일이다.
관계
132. 무엇을 주는가보다 어떻게 줄까를 더 생각하라
두 번 생각하라. 늘 재검토를 요청하는 게 안전한데, 특히 확신할 수 없을 대는 더욱 그래야 한다. 그리고 허용하거나 개선해야 할 때는 시간 여유를 갖는 게 좋다. 배풀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빨리하는 것보다 지혜롭게 배풀어야 한다. 그럴 때 늘 더 귀한 선물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주는가보다 어떻게 줄 것인가. 요즘 내 마음을 가장 오래 머물게 하는 문장이다.사람에게 마음을 건넨다는 일은, 결국 시간을 들여 생각하는 일이고, 그 사람이 나에게 남긴 따뜻한 표정을 오래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번의 충동으로 건네는 선물보다, 두 번 멈춰 생각하고 세 번 마음을 다지는 정성이 더 오래 사람 곁에 남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힘들었지만, 덕분에 깨달았다. 빠르게 주는 마음보다 천천히 전해지는 배려가 더 깊을 때가 있다. 금방 사라질 감정 한 줌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온기를 남기고 싶다.
그래서 멈춘다. 다시 생각한다. 확신이 없을 때는 손을 거두고, 조금 더 숙성된 마음으로 건네려고 한다.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카페 문을 열었다. 케모마일 향이 은근히 퍼지는 공간, 누군가는 노트북 앞에 앉아 조용히 미래를 두드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커피잔을 손에 쥐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고요함과 소란함이 한 지붕 아래서 서로 부딪히는 풍경을 보며 잠시 멈춰 섰다. 집이 가장 편안하지만, 집에 머물면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해야 할 일, 정리되지 않은 마음, 관리해야 하는 작은 세계들이 미세한 바람처럼 주변을 감싼다.
집에서는 오롯이 한 페이지도 읽기 어렵다. 그래서 도망치듯 나왔다. 이 작은 테이블 하나가 오늘의 피난처였다. 2층으로 올라가 앉을 자리를 찾아 천천히 걸었다. 누군가는 펜을 굴리고, 누군가는 조용히 숨 쉬며 문장을 읽고 있었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화려하지 않았다. 지하철역 4번 출구, 그 앞에서 하루를 견디는 수많은 얼굴들,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간판들이 포개져 붙어있는 거리. 화려한 하늘이나 산책할 수 있는 강변도 아니었지만, 그 단순한 풍경 속에서 오늘의 마음을 앉혔다.
케모마일을 식히며 가방 속 책을 꺼냈다. 그러다 문득 휴대폰이 울렸다. 희정이가 보내온 사진. 하트 모양 단풍잎. 지난주, 춘천 삼악산에서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하트모양 뻥튀기 과자를 머리 위에 올리고, 고작 그 작은 장난 하나에도 서로 웃음을 터뜨리던 순간들. 멀리 있지만 마음은 다정히 이어져 있는 친구들이다.
‘정말 고맙다.’ 가만히 사진 속 웃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워하던 정연이의 톡이 떠오른다. 다음엔 꼭 찍자고, 우리의 웃음이 증거로 남길 수 있도록 하자고. 그런 말들 앞에서 마음이 조용히 흔들린다.
그들이 내게 준 시간들, 움직임들, 배려들. 아프다고, 힘들다고, 내 기분과 체력을 살피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걸어주고 내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상황을 정리해주던 그 마음들. 그 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고마움이 목 뒤까지 차오른다. 나 때문에 친구들이 지출을 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픈 친구를 위해 쓰는 비용이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내 마음이 괜스레 무거워진다.
뭔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빼빼로데이에 보낼까? 크리스마스? 아니, 지금 보내면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지금 갑자기 선물 주면 부담스럽다. 뭐야, 울려고 하잖아?” 그럴 거다. 그리고 웃을 거다. 친구의 그 웃음이 좋다. 그 농담이 좋다. 그러니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카페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만큼 생각은 이리저리 퍼지고 마음은 수면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문득 시계를 보고 놀랐다. 20분이 사라져 있었다. 아, 시간을 낭비한 건가 싶다가도, 아니다, 마음을 정리한 것이라 안도한다. 오늘도 조금씩 다져나간다.
친구들의 진심 앞에서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들의 온기에 부끄럽지 않으려 노력하며 하루를 정성 들여 쌓아가고 있다. 그래서 다시 책을 펼친다. 문장을 읽는다. 이 순간을 살기 위해, 지금 이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병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고.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픔 속에서 배우는 사랑은 가끔 너무 눈부셔서 가슴이 저릿하다는 것을. 친구들의 마음이 내게 흘러왔다. 그 마음은 불안의 시간들을 붙잡아 주었고 내가 다시 걸어갈 길을 조용히 밝혀주었다. 그들에게 무엇을 주는가보다 어떻게 마음을 전할지 더욱 고민하는 오늘, 그 마음이 곧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되고 있다.
지금 선물을 준비하는 중이다.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빠르게가 아니라 진심으로. 서둘러 도착하는 사랑이 아니라 천천히 스며드는 사랑을 선택하며. 그래서 오늘, 집중하려 한다. 읽고, 생각하고, 적고, 내가 받은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조용히 견뎌낸다. 내가 받은 사랑의 무게만큼 누군가의 하루를 가볍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묻는다. 무엇을 줄까가 아니라 어떻게 마음을 건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