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4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가장 위대한 일이다.
관계
144. 타인의 의지를 끌어오기 위해 위장한 이익을 보여줘라.
자기 문제를 들고 나가려면, 남의 문제를 들고 들어오라. 이것은 원하는 것을 얻는 전략이다.
바쁜 아들의 일상 속에 자신의 병원 동행이 부담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 친정엄마의 마음. 그 마음 뒤에는 가족 간의 미묘한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며 엄마를 돌본다. 나는 '가족을 위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큰아들이 서울로 이사하면서 짐을 옮겨야 했다. 초보 운전 실력이 불안한 조카를 위해, 오빠에게 도움을 청했다. "가능하다"는 오빠의 대답은 간결했다. 새벽에 일찍 다녀와서 오후에 자기 집 근처에서 일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 오빠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주변에 형부도 있지만, 오빠처럼 쉽게 도움을 주기를 기대하기는 부담스럽다.
약속한 4일 후, 조카와 함께 서울로 짐을 옮기기로 모든 일정을 정리했다.
오후까지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는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근처에 사는 언니에게 손주의 짐 운반 문제를 상의했다고 했다. 두 사람은 개인 용달을 하는 형부를 시키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힘든 남동생에게 왜 부담을 주냐"는 것이었다.
엄마 입장에서도 일하느라 바쁜 아들이 본인과 조카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에게 통보했다.
"오빠랑 다 이야기 끝났는데 무슨 얘기를 한 거예요?" 내가 묻자, 엄마는 "오빠가 힘든데 불쌍하지도 않냐"며 "부탁하니까 어쩔 수 없이 가는 거 모르냐"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마음 좀 편하려고 힘든데 부탁했어"라고 덧붙였다.
저녁을 차리려는데 밥이 하나도 없었다. 언니가 다녀갔다는데 그냥 가라고 했단다. 토요일 일을 마치고 오면 늘 저녁 9시가 넘는데, 엄마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언니가 바쁜 표시를 낸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거나 먹자"는 엄마의 말에, 결국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국을 데우고, 단백질이 부족할까 싶어 달걀이라도 삶으려고 물을 가스에 올려놓았다. 엄마는 계속해서 형부가 짐 가지러 가면 된다고 말했다. 나는 생업으로 그 일을 하는데 다른 일이 잡힐 수도 있으니 불편하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컨디션도 좋지 않았고, 식사 준비에 낮에 있었던 이야기까지 더해지니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그냥 짐 다 버리고 오라고 할게"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이후 밥을 차려놓고 드시라고 해도, 엄마는 "문제만 저지르는 사람이 무슨 밥을 먹냐"며 식사를 거부했다.
항암 부작용으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는 힘들다. 그런데 가족들은 각자의 말만 하려고 했다.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그냥 지켜보고 있으면 될 텐데.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결부해서 타인을 위하는 일처럼 만들어가는 모습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아픈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족이 제일 불편한 하루였다. '가족을 위한다'는 말 뒤에 숨은 각자의 편의와 입장들. 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
항암 치료를 받으며 힘든 엄마, 바쁜 일상 속에서도 기꺼이 도와주려는 오빠, 그리고 그 사이에서 조율하려는 나. 우리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때로는 그 최선들이 서로 엇갈린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한 배려인가'를 끊임없이 돌아보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진심 어린 이해와 존중으로 함께 힘든 시간을 견디는 것. 그것이 진짜 가족이 아닐까. 오늘의 불편함이 내일의 더 나은 관계를 위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