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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기에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4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가장 위대한 일이다.

관계

147. 조언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다.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 되지 말라. 조언이 전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나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구제불능 멍청이다.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도 친절한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하고, 군주라도 다은 사람에게 배워야 한다.


누구나 살아가며 한 번쯤은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마음에 품는다. 나는 그 질문을 지금, 항암 치료라는 낯선 길 위에서 새롭게 마주하고 있다. 아픈 몸을 끌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은 단순히 치료를 위해 걷는 길이 아니다. 그 길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매번 묻는 자리다.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비로소 자존심이 아닌 용기를 배우고 있다.


아프기 전의 나는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버텨내는 것이 ‘강함’이라 여겼다. 무조건 버티고, 참고, 흔들리지 않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병은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일깨운다. 치료 과정에서 의사 한 마디, 간호사의 작은 조언, 옆 침대 환자가 전해 준 소소한 경험담 하나조차 나를 살리는 힘이 될 때가 있다. 의토 나의 생존은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손과 말이 얽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물론 모든 조언이 따뜻한 위로처럼 다가오지는 않는다. 내 몸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의 말은 불필요한 간섭처럼 들릴 때도 있다. ‘그렇게 하면 금방 나을 거야’라는 말은, 때로는 나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은 내 감정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순간마다 나는 조언을 거부하고 싶어졌다. 나에게 필요한 건 설명이 아니라 공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깨달았다. 조언은 ‘맞다, 틀리다’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의 문제라는 것을. 조언을 고르고 걸러 들을 수 있는 힘은 내가 얼마나 단단한가에서 비롯된다. 마음이 약하면 모든 말이 공격처럼 들리고, 마음이 열려 있으면 그 말 속에서 필요한 부분만 찾을 수 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건 조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언을 듣는 나의 태도였다.

항암을 시작한 뒤, 나는 삶 속에서 새로운 예의를 배웠다. 그 예의는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는 것이다. 조언 앞에서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는 예의, 조언을 무조건 받아들이지도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는 예의, 그리고 내가 어떤 상태인지 정직하게 바라보는 예의다. 도움을 받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조언은 무게가 아니라 힘이 된다.


병원에서 만난 한 환자분이 말했다. “우리처럼 병 앞에서 약해진 사람은, 듣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해요.” 그 말은 내 몸보다 마음을 더 치유했다. 듣는다는 건 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선택하는 또 하나의 행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래서 나는 예전보다 더 천천히 말을 듣고, 더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고, 필요하다면 단호히 거절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이다.

조언을 들을 때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이 나의 삶을 직접 살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조언은 방향을 알려줄 뿐, 그 길을 걷는 건 결국 나다. 누군가의 말에 기대어 걸을 수도 없고, 그 말을 핑계 삼아 멈출 수도 없다. 조언은 도움이지 해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조언 앞에서 책임을 배우고, 선택을 배우고,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다시 확인한다.

아프다는 것은 의존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내 삶이 누군가에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움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책임지는 법을 먼저 배운다. 조언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잘 지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그리고 이제는 완벽할 필요도 없다. 완벽하지 않기에 조언을 들을 수 있고, 불완전하기에 누군가에게 기대고, 다치기 때문에 사랑을 배우며, 살아 있기 때문에 배움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오늘의 나에게 필요한 조언만 품고 나머지는 흘려보낼 줄 아는 지혜, 그것이 내가 지금 배워가는 삶의 방식이다. 치료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분명해진 것이 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배우고, 듣고, 선택하며 살아갈 것이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단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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