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4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가장 위대한 일이다.
관계
149. 희생양을 두는 것도 갖춰야 할 능력이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을 넘길 줄 알라. 악의를 막아줄 방패를 지니는 일은 통치자의 훌륭한 책략에 속한다. 모든 일이 다 잘될 수는 없고,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도 없다. 그러므로자기 의욕이 좀 꺾이더라도, 불행의 표적이자 잘못을 책임질 희생양을 곁에 두어야 한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타인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을 대신해주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것이 ‘배려’이고 ‘팀워크’라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런 선택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나 역시 그랬다. 직급이 올라갔음에도 기존의 업무는 계속했고, 거기에 더해 새로운 업무까지 도맡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하면 빨리 끝날 것 같았고, 내가 해야 조직이 편해질 것만 같았다.
출근은 가장 먼저, 퇴근은 가장 늦게. 이 일상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나만의 방식으로 조직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육아 때문에 정시에 퇴근해야 하는 직원의 업무까지 내가 처리할 때면,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좋은 사람’, ‘먼저 희생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 그 직원이 퇴근하듯이, 내 집에서도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들의 기다림 또한 당연하다고 여겼다. 직장에서는 문제를 막고, 가정에서는 엄마의 부재를 감수하게 했다. 나는 가정과 직장의 ‘불편함’을 혼자 떠안아 해결하고 있다는 이상한 자부심 속에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균열이 생겼다. 나는 조직에서 실무자도 아니고 리더도 아닌 애매한 위치가 되어 갔다. 내가 없으면 업무가 멈추고, 내가 있으면 직원들은 일의 책임을 회피했다. 어느 순간, 나는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조직의 모든 문제를 받아내는 희생양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대신해주는 일’이 빠른 해결책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는 반복되고, 더 커졌다. 내가 대신 일을 처리해주니, 그 직원은 완전히 기댔다. 관련 업체는 피드백이 늦다며 불만을 쏟아냈고, 팀의 신뢰는 무너져갔다. 나 혼자 업무 처리를 늘리며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문제를 키운 것은 나였다.
이때 필요한 것은 친절이 아니라 경계였다. 업무 분장의 기준을 바로 세우고, 책임을 명확히 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환상 속에 있었다. 갈등을 피하고 싶었고, 충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부드럽게 해결하면 직원도 바뀌고, 스스로 성장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내가 배려할수록 상대는 더 편해졌다. 나는 노동을 대신했고, 상대는 책임을 대신받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직원은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업무 능력이 아니라, 내가 모든 책임을 떠안아주는 구조 때문에 생긴 권력이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고 하기에는 내가 발등을 스스로 내어준 것이었다.
문제는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역할이었다. 조직에서 역할이 무너지면 개인의 직업 정체성과 자존감이 흔들린다. 나의 희생은 조직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조직의 건강한 운영을 방해하는 선택이 되었고, 직원의 성장까지 가로막았다. 나는 ‘리더처럼 행동하지만 리더의 권한은 가지지 못한’ 아이러니 속에 있었다. 리더십은 업무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 경계를 명확히 만드는 일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간과했다.
또한 이 과정은 가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이들은 점점 엄마 없이도 기다리는 법을 배웠고, 나는 부재한 자리에 익숙해졌다. 가족에게도 희생을 강요한 셈이었다. 직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다 정작 가장 소중한 가족에게 문제를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착한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지만, 사실은 회피와 착각이었다.
이제 돌아보니, 희생을 떠안는 것이 능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생양을 두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누군가에게 ‘잘못을 책임질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이 통치자의 책략이라 했듯, 조직에서도 각자가 책임질 역할이 있어야 한다. 그 자리는 누군가의 처벌이 아니라, 성장의 시작이다. 책임을 지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고, 책임을 대신해주는 친절은 결국 모두에게 독이 된다.
리더란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책임을 분리해 조직의 균형을 세우는 사람이다. 각자의 역할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 결국 조직을 지킨다. 나의 희생이 아무도 바꿔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헌신이 아니라 무책임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착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호함이 필요한 때가 있다. 혼자 다 떠안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나눠서 책임지게 하는 것이 진짜 능력이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배운 것이 다행이다. 진짜 리더십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양이 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