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1부 인간의 위대함은 운이 아니라
미덕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미덕
005. 사람들이 당신에게 매달리게 하라
의존하게 만들라. 현명한 사람은 자신에게 감사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원한다. 평민의 감사보다는 궁정의 기대를 받는 편이 낫다. 전자는 잊히지만, 후자는 기억되기 때문이다.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면 예의 바른 행동도 사라지고, 그렇게 존중도 끝난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유지해야 한다. 왕관을 쓴 군주라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는 일, 그것이 관계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야 할 건 자기 자신을 꾸준히 가꾸는 일이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살다 보면, 정작 사람들은 그 깊은 뜻보다는 그저 편리한 ‘일회용 종이컵’처럼 여기기 쉽다.
3개월 전, 직장에 다닐 때와 지금 휴직 중인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수많은 거래처, 직장 선후배와 쌓아온 돈독한 관계들, 가족과의 유대마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어쩌면 그 길이 처음부터 내가 생각한 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착각은 나의 몫이었다.
나는 인색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나에게 인색해졌다.
다행인 건 그런 감정을 드러낼 기운조차 없다는 것이다. 아픈 몸으로 오늘을 견디는 일, 그것 하나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건강할 때, 필요할 때만 곁에 있는 게 사람인가 보다. 섭섭해할 필요는 없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기면 된다.
누구나 이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다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해지는 이 시기, 생각의 끈이 끊어질까 두려워 책을 읽고 사색하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든다.
내려놓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할 무렵, 눈앞에 서 있는 이기심을 마주하게 된다. 아픈 내가 오히려 더 피해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항암치료 중인 내게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그럼에도 형제들은 “혼자 엄마를 위하는 척하는 거 아니냐”고 말한다. 그래서 요양병원 이야기를 꺼냈던 것 아니냐고.
결국 나를 제외한 모든 형제들은 “우리 집엔 못 모신다”고 했다. 갈 곳 없는 엄마는 아픈 딸의 집에 남겠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견뎌볼 때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항암치료가 길어질수록 내 부작용은 심해지고, 엄마 역시 점점 더 아프다고 말한다. 형제들은 여전히 각자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손사래를 친다. 점점 더 지쳐간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 혹시 자기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으려는 본능? 조금이라도 손해 보기 싫은 마음?
인생, 그리 길지 않다. 부모님과 함께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안간힘이 필요 없었던 걸까? 오히려 독이 되었을까? 어느 순간, 나는 필요 이상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의지하도록 만들더라도, 그 선은 내가 정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희생은 오히려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 된다.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선 안에서 관계를 조율해야 한다. 후회도, 아쉬움도 남길 필요 없다.
누군가는, 나의 희생을 애써 기억하지 않고, 그냥 ‘그래야 했던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