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샘 Apr 01. 2022

수업 속 자존을 찾아서

저마다의 수업에는 역사가 있다

저마다의 수업에는 역사가 있다


신규 때를 돌아보면 열정이 가득했다. 뜨거운 열정만큼 수업은 타오르지 못했다. 나름대로 이상을 가지고 수업을 준비해서 교실에 들어가면, 내 환상은 뿌지직 깨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이상과는 철저히 다른 시간이 신규 때의 수업이었다. 경험이 부족했기에, 학생들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았기에 겪어야 할 시행착오임에도 난 나의 서투름이 답답했다.


  교사들의 자료의 보고인 인디스쿨에 들어가면, 선생님들이 어찌나 멋진 자료를 올려놓으시던지 입이 쩍 벌어진다. 수업 고수들의 자료를 다운로드하여 교실에 써 보면, ‘어라, 왜 나는 안 되지?’하는 순간을 만난다.


  그런 나의 수업임에도, 순간순간 나의 마음이 담긴 수업이 가뭄에 콩 나듯 나올 때가 있다. 사막과 같이 황량하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컴컴한 밤과 같은 순간에도, 잠깐 번뜩이는 섬광이 지나갈 때가 있다. 어두움 속에서 묵묵히 빛을 내는 별을 찾을 때가 있다. 그 빛을 찾아 헤매며 수업을 하고, 나이를 먹었다.


  나무에 나이테가 그려지듯 수업도 나이를 먹어간다. 때로는 고통의 시간이 흔적을 남기기도 했고, 성장의 기쁨이 남겨지기도 했다. 그렇게 나만의 수업의 역사를 써 가면서도, 나는 다른 사람이 부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게 있는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하고, 남들을 따라 하기 바빴다.


  “우와, 저 선생님은 어떻게 저렇게 ~을 적용해서 수업을 잘하시지?”

  “저 선생님은 어쩜 저렇게 차분하게/카리스마 있게 학급을 운영하실까?”

  “저런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열정은 어디에서 나올까?”


  난 내가 동경하는 그들과 같이 되고 싶었다. 시선을 타인의 빛에서 거둘 수가 없었다. 내 속에 있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절망의 시간 또한 나의 역사임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수용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있다면, 수업에도 터닝포인트가 있다. 그 터닝포인트는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마음에서 철학이 자라나고, 신념이 굳세 자리 잡아간다. 나의 마음에 변화를 준 일은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교사 3년 차 때, 나에게 터닝포인트가 있다면 같이 협력수업을 하는 원어민 선생님을 만난 것이었다. 원어민 선생님은 나에게 수업 친구였다. 3월 첫 주, 1년의 과정을 같이 계획하고 전략을 짰다. 서로의 수업 철학이 부딪히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다듬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수업 전에 같이 수업을 계획해서 준비하고, 수업한 후에는 서로에게 피드백을 줬다. 수업에서 어려운 문제 상황을 만나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해결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면서 그 과정 과정을 기록했고 수업을 촬영해서 모니터링하기도 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고민할 수 있었기에 덜 외로웠고 든든했다. 피드백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수업 나눔’의 ‘수

(受)’자도 모르던 내가 원어민 선생님과 수업 나눔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해, 나는 초등영어 실행 연구회에서 실행 연구(action research)를 하기 시작했다. 실행 연구는 ‘계획-실행-관찰-성찰(plan-act-observe-reflect)’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영어교육과 관련된 원서를 탐독하고 정리해서 발표하고 토론하며 수업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실행 연구를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수업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수업을 촬영하고, 학생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내 수업 성찰일기를 쓰는 습관이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수업에 관해 고민할수록, 수업이 성장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했다.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준비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어째서 안 되는 지점이 있는 것일까? 난 왜 여전히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겁을 내지? 왜 열등감은 노력으로 해소되지 않는 것인가?’


  외모 콤플렉스가 있을 당시 수업 대회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원인을 외모로 돌렸다. “난 예쁘지 않아서 그래.” 학생과의 관계가 어려울 때는 성격 탓을 했다. “내가 소심해서 그래.” “내가 마음이 여려서 그래.” “어렸을 때 힘들었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그래,” 그렇게 여전히 부딪히는 벽 앞에서 펑펑 울었다. 아무리 애써도 난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알 수 없는 실체, 높은 기준에 도달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독한 열등감도 숨기고 싶었다. 자존감을 가지라는데, ‘자존감을 가져야지!’ 한다고 없던 자존감이 생기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참 감사한 것은, 그런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20대의 광풍과 같은 시절이 지나가고,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조금씩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날 존재로 소중히 여겨주는 동료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나 자신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충분히 애썼다.’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는 말이 이전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조금씩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애써도 풀리지 않던 ‘수업 속 자존’의 문제도 수업코칭 연구소 좋은 선생님들과의 나눔을 통해 조금씩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은 성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고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고귀함을 보지 못했을까? 늘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평가받는 데 익숙한 우리이다. 그럼에도 나 겉모습과 관계없이 날 이해해 주는 말 한마디, 따스한 말 한마디가 조금씩 내 마음을 열게 했다. 수업코칭연구소에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자존이다. 내 자신의 존엄을 찾으려 할 때에는 공기처럼 잡히지 않던 자존감이 누군가의 온기로 자라기 시작했다.


  자존감은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꾸준한 자기 계발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는 자라겠지만, 진짜 중요한 자존감은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외롭던 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나누어주는 따듯한 마음이 내 영혼을 살아나게 했다. 그래서 신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나 보다. 사랑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빛나기 때문이다.


  그런 자존감 속에서 다시 수업을 세워가고 있다. 비록 어떤 화려하고 뛰어난 성과를 내지 않더라도, 보통의 교실, 보통의 교사로 삶을 정성껏 살아내고 있다. 내가 받았던 사랑을, 남몰래 울고 있을 아이에게 나누어주길 바라며 수업에 들어간다.



앞으로 내가 쓰고 싶은 수업의 역사는?


 과거를 돌아보면 뿌듯한 순간도, 아쉬운 순간도 한데 얽혀 나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가끔씩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문장이 머릿속을 어지럽힐 때가 있다. 그러나, 과거에 내가 한 선택은 내 몸의 온 세포 하나하나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한 선택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과거는 감사로 재해석하고, 현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떤 방향일까? 수업에 있어서도 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이라고 했는데, 내가 쓰고 싶은 수업의 역사에 관해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자존이 살아 숨 쉬는 수업을 하고 싶다. 서로 존중받고, 존재 자체로 귀히 여겨지는 수업을 꿈꾼다. 공부를 잘 하든, 잘하지 못하든, 부자든 그렇지 않든 함께 어울려 서로를 귀히 여기고 아끼며 서로를 통해 배우는 수업을 하고 싶다. 어두움 속에서 묵묵히 빛을 내는 별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사랑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랑을 따라가다 보면 수업도 마음도, 인생도 함께 자라리라 믿는다.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 산속에서 中, 나희덕

작가의 이전글 내 속의 시인을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