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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Apr 09. 2022

난임으로 인해 스토리가 생겼다

모든 일에는 다 의미가 있다

"선생님, 선생님 이야기는 푹 빠져서 듣게 하는 힘이 있어요."


오늘 선생님들 모임에서 한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말이 귓가에 맴돈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 보았더니 다름 아닌 난임의 공이 크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숨기고 싶은 난임의 이야기인데, 나의 삶이기에 어떻게든 표현이 되는 난임이다. 어쨌든 지금 나의 정체성의 큰 부분 중 하나는 '난임 여성'이기에, 이 정체성과 나를 분리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곱고 따뜻한 지인들의 마음에 살포시 다가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올해 복직을 하면서 자취방을 얻었다. 20대 때 살다가 다시 30대 후반에 살게 된 원룸은 조금 낯설었다. 휴직 중에는 대출을 많이 할 수 없어 개학 이틀 후, 대출을 받아 얻은 전세 원룸이다. 준비성이 투철했다면 이불이랑 수건을 제대로 챙겨서 시작해야 했을 텐데, 새 학기 준비에도 정신이 없었던 나는 빈 방에 들어와 잠바를 이불 삼아 누웠다. 수건이 없어 급히 마트에 가서 수건과 생활용품을 사 온 후, 수건을 빨아서 축축한 수건에 얼굴을 닦았다. 그래도, 내 머리 누일 곳이 있다는 게 참 감사했다. 조금씩 조금씩 집에서 이불, 베개도 가져오고 생활용품도 가져오니 집이 집다워졌다. 학교에 다녀오면 피곤해서 베개에 머리를 누이면 5분 안에 잠이 들었다. 난임 휴직 기간 시달렸던 불면증에서 탈출했다.


2년의 난임 휴직 후, 내가 여전히 싸워야 했던 질문은


"난임 휴직기간 나는 무엇을 했는가?"였다.


8번의 시험관 시술 후 남은 것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과, 슬픔을 이겨낸 강인한 마음이었다. 3월 동안 아팠다. 계속되는 기침으로 코로나는 아닌가 해서 하루에도 신속항원검사를 2번 한 적도 있었다. 병원,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기도 했다. 혹시라도 코로나인데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다행히 검사는 할 때마다 음성이었다. 콧속을 면봉으로 깊이 안 찔러서 그런가 싶어 갔던 병원에 갔었는데, 깊이와 상관없이 음성이라는 결과는 감사했고, 반가웠고, 의문스러웠다. 다행히 3주 정도가 지나면서 기침이 괜찮아졌다.


기침 증상과 같이 시달렸던 증상 중 하나는 복통이었다. 수업 준비를 마친 새벽 2시, 갑자기 위산이 역류하는 것이 느껴지며 배가 타는 듯이 아팠다.


'참을만한가? 응급실에 갈까?'를 여러 번 고민하다가 새벽 2시 30분경, 차 키를 꺼내 운전해서 응급실로 향했다. 절반쯤 왔을까 통증이 견딜만해졌다. 응급실에 가면 수액을 맞느라 잠을 못 잘 텐데, 차라리 집에 가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시 원룸 방에 와서 침대에 누웠다. 새벽 3시 30분경 잠에 들었다. 다행히 아침에 일어났을 때,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감사했다.


그 주, 매일 밤 12시까지 수업 준비를 했다. 코로나로 인해 결석한 소수의 학생을 위한 대체학습 온라인 콘텐츠를 만드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수면부족이 역시나, 끔찍한 두통을 일으켰다. 다행히 10시에 잠에 드니 다음날 아침 통증이 괜찮아졌다.


아.... '잠'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치유의 능력이 있구나.

잠이 너무너무 고마웠다.


그다음 주, 새벽 5시경 일어났는데 가슴이 너무 아파 일어났다. 일어났는데도 가슴의 통증이 지속되어 무서웠다. "내가 이러다가 죽는 것이 아닌가? 원룸 방에서 내가 죽으면 당분간은 아무도 모를 텐데... 원룸 비밀번호를 남편 외에도 지인에게 알려줘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운 마음에 인터넷에 '새벽 심장 통증'을 검색해 보니 '협심증'이 나왔다. 협심증 검사 절차를 살펴보니 복잡했다. 심장 초음파뿐만 아니라 조영제를 넣고 검사를 하는 것 같았다. 굳이 협심증이라고 결론 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어가길 기도했다. 그날 저녁, 잠에 드는 것이 무서웠다. 또 아침에 심장이 아플까 봐. 다행히 아침에 심장의 통증이 더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감사했다.


그렇게 폭풍 같은 3월을 보내고 4월이 되니, 아팠던 증상이 깨끗하게 나았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고, 창백했던 얼굴에도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3월 동안에는 밥을 먹는 때, 모래를 씹는 것 같이 목구멍에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랬는데, 어느덧 내가 급식의 식판을 깨끗하게 비우기 시작한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시어머님께서 매주마다 정성껏 만들어주신 반찬과, 한의원에서 비싼 돈으로 지어주신 한약의 힘도 큰 것 같다.


소중한 가족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가? 일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고, 따뜻하게 잘 수 있는 집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게 나는 학교에 적응해 갔고,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좀 더 건강한 관점에서 나의 난임 시기를, 그리고 현재를 관찰하게 되었다.


3월의 어느 날, 옆자리에 앉으신 부장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OO, 난임 휴직 동안에 아무것도 안 했다고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 자기는 그 시간을 이겨냈잖아. 고난을 이겨낸 사람은 그만큼 더 강하고, 아름다운 거야."


그런가 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아무런 임신의 성과 없이 복직을 했지만, 덕분에 스토리가 생겼다. 인생의 어려움으로 고통받고 있을 누군가에게 나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생긴 것이다. 타인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민감성이 더 생긴 것이다.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꿈꾸었지만, 참으로 인생에서 굴곡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굴곡이 굽이 굽이돌고 돌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되어가나 보다. 마치 강물이 굽이 굽이 돌아가며, 여러 생명들을 키우는 물줄기가 되듯이 말이다. 나의 이런 인생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길 꿈꾸며 내 삶을 소중히 가꿔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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