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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영 Aug 15. 2018

자존감을 꼭 높여야 하는가?

한겨레 자존감 기사를 읽고

 <자존감도 좋지만... 그게 다 자존감 낮은 내 탓인가요-자존감 향상 트레이닝 열풍>이라는 제목의 8월 12일 자 한겨레 기사를 읽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7207.html).  자존감 열풍에 대한 문제의식이 반영된 기사였다. 기사는 요즘 2030 세대가 겪고 있는 심리적 문제의 원인을 낮은 자존감 탓으로 돌리면서 자존감 향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보는 일부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특히 이러한 흐름을 틈타 효과를 알 수 없는 자존감 프로그램을 ‘장사’하는 업체들을 비판했다.


2030 세대가 겪고 있는 심리적 어려움이 낮은 자존감 문제와 같은 개인 차원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기사의 입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나라 젊은 세대(사실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전 세대)가 현재 겪고 있는 심리적 고통의 많은 부분이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로 사회 - 혼신의 힘을 다해야 평범하게 살 수 있다

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평균 근로시간은 2016년을 기준 2069시간으로, 전체 평균 1763시간에 비해 306시간이나 많고, 과로사 문제로 떠들썩한 일본(1713시간)보다도 훨씬 많다. 좀 더 와 닿게 이야기하면,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OECD 평균 노동자들에 비해 1년에 한 달 정도 더 일하고, 독일(1363시간) 노동자들보다는 무려 넉 달이나 일을 더 많이 한다. 특히 장시간 노동자(주당 60시간)의 비율은 22.6%인데, 이는 45개국 가운데 2위로, 우리나라 노동자 5명 중 1명 이상은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워낙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직장인들이라면 정시 퇴근하는 일이 ‘소원’이고 너도나도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린다. 장시간 노동으로 망가진 건강은 제약회사에서 광고하는 무수한 종류의 영양제로 보충하고, 쉬는 날이면 좀비처럼 잠을 몰아서 자거나 즉각적으로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TV/영화 시청, 쇼핑, 맛집 가기, 여행 가기 등)에 기대어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 잊고 그간 누적된 피로를 해소하려고 한다. 그렇게 신체적/정신적 에너지를 보충해야만 다시 지옥 같은 일터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의 저자 김영선 박사는 현재 장시간 노동 체제는 발전 국가 시기에 고착된 시간 통제의 유물이자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간 통치(경쟁적 조직 문화, 실적 중심의 관리)가 중첩된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산업화 시기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국가의 성장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붙여진 ‘수출 역군’, ‘산업 전사’등의 이름으로 장시간 노동을 당연하게 감내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근면 신화는 좀 더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하여 우리를 장시간 노동으로 내몬다. 우리 시대의 노동자들은 ‘자기계발 논리’에 따라 장시간 노동을 ‘자발적(인 것처럼)’으로 견뎌낸다. 일하지 않으면 국가고 뭐고 간에 ‘내가’ 파이를 얻지 못한다.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는 이제는 ‘개인’의 문제다.      


신자유주의 근면 신화는 자연법칙처럼 거의 의문시되지 않는다. 성공은 자기계발 노력의 결과다. 뒤처지거나 못 사는 사람들은 게으르거나 정신력이 나쁘기 때문이고,  경쟁에서 승리하고 잘 사는 사람은 ‘시간’과 ‘멘탈’ 관리를 잘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결국 자기계발에 철두철미한 사람들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학에 가까울 만큼 혹독하게 노력하여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가 회자되고 개인은 이런 사람들을 롤모델 삼아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데 몰두한다. 요즘에는 자기계발 시장도 진화해서 여러 과학적 연구 결과들에 근거해 나를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쥐어짤 수 있는 비법들을 전수하고 있는데(ex. <완벽한 공부법>의 저자 신영준 씨의 멘토링), 여하간 자신의 노력에 따라 성공이 좌우된다는 기본 전제는 변함이 없다. 근면-성공 담론을 양산하는 주체와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 간의 상호의존 관계에 의해 오늘날의 근면 신화는 공고화된다.      


물론 현 노동시장 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게임의 룰’을 지키지 않으면 낙오된다는 불안감 때문에 결국 대열에 합류한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불일치할 때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가 발생한다. 특히 이미 행한 행동이 자신의 신념과 모순될 때 생각을 바꾸는 쪽이 훨씬 쉽다. 노동시장 구조가 불합리하긴 하지만 ‘이 직장이 아니라도 다른 직장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우리는 나은 편이다’, ‘칼퇴라도 하니 다행이다’ 등으로 생각을 바꿔 인지부조화로 인한 불편감을 줄인다. 이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 발짝 더 나아가 희생하고 착취당하는 것이 ‘원래 당연하다’고 믿고 직접 실천하면서 이를 주변 사람들에게 은근히 혹은 직접적으로 강요할 때(ex. 칼퇴하는 사람을 눈치 주거나 개념 없다고 말하기), 현재 노동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이 문제를 가시화하기 어렵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셈이다. 물론 ‘나도 이렇게 욕구를 억누르고 눈치 보면서 살고 있는데 네가 뭔데 튀려고 하느냐’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나도 그런 오류에 빠진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한계치는 계속 올라간다. 이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해야 평범하게 살 수 있다.


인권에 대한 예민한 의식을 가지고 시장을 일정 부분 규제하지 않는 이상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불균등한 배분은 계속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덕분에 기술이 발전해서 삶이 편리해졌다고는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노동시간은 줄지 않고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삶의 질은 저하되고 있다. 거대 자본을 가진 사람은 우리의 ‘시간’을 마음대로 부리며 부를 증식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재벌 위주의 정책을 오랫동안 지속하고 있어 구조적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낙수효과는 이제 미미하고 ‘국가경쟁력’이라는 미명 하에 하청업체 착취와 비정규직 양산은 심화되고 있다.      


위기에 내몰린 2030 세대 - 자존감 저하는 어쩌면 당연하다

특히 우리나라 2030 세대는 어릴 때부터 상향 평준화된 입시경쟁에 내몰렸고 대학에서는 스펙 경쟁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노력해도 이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이고 안정적인 파이가 매우 적어, 다시 피 터지게 경쟁해야 한다. 결국 많은 2030은 불안정하고 처우가 좋지 않은 환경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 괜찮은 자리는 너무 적고 다른 데 가봤자 비슷할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부조리함을 견디려고 나름대로 애쓴다.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멘탈이 나가거나 건강이 악화되어 (자살하거나 과로사하지 않으면) 퇴사나 이직을 선택하는데, 애석하게도 ‘요즘 젊은 세대는 나약하다’는 윗세대의 핀잔을 듣기 일쑤다. 같은 세대 내에서도 서로 파이를 두고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연대하기도 힘들다. 이래저래 젊은 사람들은 외롭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2030 세대의 ‘자존감 저하’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태생이 금수저가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친 풍파를 맨몸으로 견뎌낼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안정적으로 높은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이나 욜로(You Only Live Once)를 추구하는 현상도 삶과 일의 균형을 이루기 너무 힘들고, 죽도록 일하고 자기계발하느라 인생을 즐길 여력도 없고 즐기는 방법도 모른다는 문제의식에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워라밸과 욜로 마저도 자기관리의 일종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자신을 존중하고 행복을 느끼는 것마저도 성취해야만(must)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성취할 수 있는 것과 성취해야만 하는 것은 다르다). 자기를 존중하기 어렵고 행복을 느끼기 힘든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가진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 낮은 자존감 때문이고 자존감을 올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뭔가 내 탓만 하는 것 같아 억울하고 화가 치밀 수 있다. 한겨레의 이번 기사도 그런 생각과 감정을 바탕으로 쓰인 것이라 생각한다.


자존감이란 무엇인가?

자존감은 일상적으로 널리 쓰여서 매우 친숙한 단어이지만 막상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학자들도 사실 자존감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자존감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존감의 여섯 기둥 Six Pillars of Self-Esteem(1994)>의 저자이자 자존감의 대중화에 기여한 너서니엘 브랜든(Nathaniel Branden)에 따르면, 자존감은 자기 평가적(self-evaluative) 개념이자 삶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필요한 기본적인 자신감인 ‘자기 효능감(self-efficacy)’과 자신이 행복을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자기 존중(self-respect)’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내가 무언가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사랑받고 행복해질 가치가 있다고 믿고 그렇게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는 더 나아가 자존감을 떠받치고 있는 여섯 기둥으로 자기 인식(의식하며 살기), 자기 수용, 자기 책임, 자기 주장, 자기 실현(목적에 집중하기), 자기 통합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도 모두 튼튼해야 ‘진정한 자존감’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심지여 각 기둥마다 여러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자존감 개념은 자기와 관련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요소들을 집대성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자존감이 정말 이렇게나 좋은 뜻이라면 자존감을 안 높일 이유는 없지 않을까?     



일반 연구자들은 자존감을 그렇게 포괄적인 개념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자존감이 ‘자기 평가적(self-evaluative)’ 개념이라는 것과 자신의 성취(능력 측면)와 가치(대인관계 측면)에 대한 평가와 그와 관련된 감정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자존감이 높을수록 부정적 지표가 낮고 긍정적 지표가 높게 나타난다는 연구결과들이 많이 축적되면서 약 30년 전에 자존감이 만병통치약 인양 미국 전역이 떠들썩했던 바 있다. 지금 그 바람이 뒤늦게 한반도 출판 시장과 몇몇 업체들을 통해 불고 있는 것이다(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활발하게 연구하는 학자들이 주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만 오천 건이 넘는 자존감 연구가 진행되면서 자존감이 그렇게 완벽한 개념은 아니라는 결과들이 속속들이 밝혀져 왔다. 물론 자존감이 낮으면 여러 심리적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하지만 자신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려다 보면 자기중심성이나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쉽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높이려고 타인을 깎아내리고 다른 집단에 더욱 심한 편견을 보일 수 있다. 또한 자존감을 과도하게 보호하거나 높이려는 과정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해 결국 자기 발전의 저해를 초래하기도 한다(Neff, 2011에서 재인용). 이외에도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자존감을 좀 더 세분화하려는 시도들이 있었고, 진짜/가짜 자존감, 명시적/암묵적 자존감, 안정적/불안정 자존감, 전반적/영역 특정적 자존감, 집단적/개인적 자존감 등 여러 개념들도 나타났다(Pyszczynski et. al., 2004).


결론적으로는, 자존감이 유용한 개념이긴 하지만 우리네 정서적 건강을 측정하는 가장 정확한 척도는 아니라는 점에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나를 꼭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는가?

요즘 학계에서는 오히려 나를 꼭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다는 생각에 의문을 가지고 ‘비평가적’인 심리치료 접근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70년에 나온 로저스(Rorgers)의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gard)’ 개념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 제시된 네프(Neff)의 자기 자비(Self-compassion), 헤이즈(Hayes)의 ‘수용(Acceptance)’, 동서양의 만남으로 개념화된 ‘마음챙김(Mindfulness)’과 같은 개념들이 더욱 각광받고 있다. 사실 개념 하나 하나 지면을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해야 하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자신의 욕구, 감정, 생각 등을 억누르거나 부인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기꺼이 경험하는 태도와 관련된 개념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비평가적이다. 물론 평가는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평가하지 않아도 될 영역에서도 모두 획일적으로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며 고통을 겪는다.     


요즘 우리나라 출판 시장에도 ‘자기 수용적’ 접근을 취하는 책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그럼에도, 나를 사랑한다>, <각자의 리듬으로 산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 등이 그런 책들이다. 대충 ‘자존감’ 높이는 책들로 잘못 범주화되고 있는데, 비교적 일관적인 이론적 바탕을 가지고 저술한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그럼에도 나를 사랑한다>를 제외하고는 ‘자기 수용’, ‘자기 합리화’, ‘체념’, ‘특정 영역에 국한된 자기 긍정’을 마구 혼용해서 더욱 그럴 수밖에 없지만, 대체로 ‘나를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평가로 점철된 세상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내 개성대로 살겠다고 선언한다.       


자존감이 꼭 높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존감을 중심으로 심리치료를 하거나 코칭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선의에서 그렇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개인의 힘만으로 어쩌지 못하는 환경적 요소를 바꾸자고 하기보다는 개인이 변화할 수 있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자연스러울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존감을 핵심으로 보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존감의 정의와 그 한계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사람이나 업체가 많이 있는 것 같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특성이라는 자의적인 행동 지표로 '자존감이 낮다'는 '진단'을 함부로 내려 상처를 주기도 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는 범주화(혹은 낙인)는 자기충족적인 예언으로 작동하여 오히려 자존감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치료자나 심리 서비스 제공자가 자존감 향상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내담자나 서비스 이용자가 처해 있는 환경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거나 고려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자존감이 높아질 권리는 있지만 자존감이 높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모두 행복해질 권리는 있지만 모두 행복해져야 하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자존감이나 행복은 무언가를 했을 때 주어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목표로 삼으면 오히려 이루기 어려운 속성이 있다.


자존감을 "꼭" 높여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업체를 만나면 미련 없이 걸어 나오길 바란다.               


곁에함께심리상담센터 대표 / 임상심리전문가 백소영


참고문헌

<누가 김 부장을 죽였나> 김영선, 한빛비즈

<자존감의 여섯 기둥>, 너새니얼 브랜든, 교양인

Pyszczynski, T., Greenberg, J., Solomon, S., Arndt, J., & Schimel, J. (2004). Why do people need self-esteem? A theoretical and empirical review. Psychological Bulletin, 130(3), 435.

Neff, K. D. (2011). Self‐compassion, self‐esteem, and well‐being. Social and Personality Psychology Compass, 5(1),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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