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귤 향기에 취하다

by 배태훈

애월읍 집 주변을 다니다 보면 돌담 너머로 낮게 자리를 잡은 나무들이 많다. 주변에서 귤나무라고 알려주셨다. 귤은 서귀포 지방에서 많이 나는 줄 알았는데, 제주도 전 지역에서 귤이 나온다고 했다. 애월읍에서 귤을 키우시는 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서귀포에서 나는 귤보다 온도 차가 나는 애월읍에서 나온 귤이 더 달고 맛있다고 자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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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나무는 사계절 내내 푸릇하다. 초여름인 5-6월에 하얀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 아주 작은 초록색 열매가 맺히고, 잎은 그 색이 더 진해진다. 여름 내내 귤 밭을 보며 동네 길을 다녔는데, 열매가 맺힌 걸 전혀 몰랐다. 어느 날 문득 짙은 초록색 열매가 보여서 깜짝 놀랐다. 귤잎과 색이 똑같아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에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귤은 그렇게 묵묵히 열매를 키워나갔다.


11월이 다가오면 무심코 지나간 곳이 귤 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황색 빛을 내밀며 자신이 존재를 알리는 귤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귤이 익어가고 있다. 이때 귤을 자세히 보면서 ‘세상에 이렇게 못생긴 귤은 처음 본다’는 생각을 했다. 초록색 열매의 싱그러운 분위기도 없고, 주황색 빛을 내며 귤의 진한 향기를 발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사춘기 청소년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기를 지혜롭게 잘 넘기면 멋지고 아름다운 어른의 모습을 갖추는 것처럼 귤도 이 시기를 잘 넘기면 향긋한 귤 향기와 함께 맛있는 귤로 익어가게 된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올수록 귤은 점점 익어가고 수확을 해달라며 있는 힘을 다해서 가지를 땅으로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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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어느 날, 집주인이 컨테이너 한 박스(과일 수확용 플라스틱 박스)를 가지고 찾아오셨다. 주변에 귤 농사를 하는데 먹으라고 몇 상자를 주셨다며 주셨다. 바로 수확한 귤을 이렇게 많이 주시다니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상품가치가 없는 귤이에요. 그래도 맛은 있어요.”


집주인의 말처럼 겉모습은 볼품없었지만, 맛은 일품이었다. 귤 상자를 가운데에 놓고 식구대로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모른다. 태어나서 하루에 귤을 그렇게 많이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귤을 깐 손톱 밑이 노랗게 물들었다. 며칠 후, 주인집에서 귤 상자를 한 상자 더 주셨다. 그리고 또 며칠 후, 제주에서 알게 된 지인이 귤 상자를 몇 개 더 주셨다.


“제주도에 살면서 귤을 사 먹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일 거예요. 대부분 귤 농사를 하고 있으니까요.”


제주도에서 몇 대에 걸쳐 귤 농사를 하고 있는 분의 말씀이었다.


12월이 되자, 제주도에서 알게 된 분들이 귤을 주셨다. 주시는 귤마다 맛있었다. 하지만 매일 귤만 먹고는 살 수 없는 노릇. 집에 귤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고, 썩는 귤들이 생기고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귤 정리를 시작했다. 썩은 귤은 버리고, 신선한 귤들은 모아서 냉장고에 넣고 조금 덜 싱싱한 귤로 귤 잼, 귤 청을 만들기로 했다. 며칠 동안 귤 정리를 하고 나니 우리의 첫 작품인 핸드메이드 귤 잼과 귤 청이 탄생했다. 집안에 가득한 귤 향기에 취해 겨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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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원주민들은 귤을 수확하는 이 시기에 모두 바빴다. 평일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선조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귤 밭을 가지고 있어서, 주말엔 귤 농사를 하고 있는 분이 많았다. 수확시기에 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온 가족, 친척, 친구들까지 귤 따는 일에 동원됐다. 우리 가족도 귤을 수확하는 데 와서 도와줄 수 있냐고 요청이 들어왔다. 체험학습 겸 재미 삼아 귤 밭에 가서 귤을 따는 방법을 배우고 열심히 귤을 땄다. 우리에게 배당된 나무는 두 그루였다.


“우리가 초보라서 두 그루만 하라고 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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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 그루는 일도 아니다’라며 호기롭게 귤을 따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재미있다고 하더니 30분쯤 지나니까 귤을 따지 않고 놀고 있었다. 1시간이 지났지만, 한 그루도 끝냈지 못했다. 여기저기 숨어있는 귤들이 얼마나 많은지 따고 또 따도 귤이 보였다. 귤 따는 게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 깊이 숨은 귤을 따다가 나뭇가지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허리를 숙이고 장시간 일을 하다 보니 허리도 아팠다. 그래도 우리에게 맡겨진 배당된 나무를 모두 마쳤다. 땅으로 ‘쭈~욱~’ 늘어졌던 나뭇가지들이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은 듯 힘을 되찾은 것 같았다.


요즘처럼 찬바람이 불어오는 시기가 되면 귤 향기에 취했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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