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는 한에서.
저는 단 한 번도 편지라고 할 만한 것을 적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 초등학교 때 수련회에서 강제로 적었던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는 제외하고요.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쪽지를 적어 다른 친구들에게 건네 멀리 떨어져 앉은 친구와 소통하곤 했습니다. 재래식 메신저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제가 가장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쪽지를 적어 다른 친구에게 전달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전달을 ‘부탁 받는’ 쪽이었으니까요. 그 마저도 중학교 때까지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제 귀신같은 몰골 때문인지 부탁조차도 하지 않더군요.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수기로 적어 보내며 조금이나마 그 시절의 결핍을 채워 봅니다.
이 작업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지금 제가 머무는 곳에선 연필이나 펜 같은 것을 반입, 소지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자해와 타인을 공격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보호사들은 설명합니다. 지금도 감시 아래 글을 적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적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바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걸어오는 저를 보고 굳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준다든지 안전벨트를 할 때까지 차를 출발하지 않는다든지 J의 행동은 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운전하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확하게 2:8로 나눈 머리, 높은 콧대, 뾰족한 콧방울, 턱 끝을 꼭짓점으로 수렴하는 날카로운 턱선, 수염 자국조차도 없는 하얀 피부, 위로 빙긋 솟은 입꼬리. 얼굴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직감이라고 할까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시선을 느꼈는지 J가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며 ‘왜요?’라고 물었습니다.
그의 연락을 받은 수요일, 저는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상기했습니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를 말이지요. 그런 덕에 연락을 기다리며 상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변죽 좋게 생글거리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처하는 그를 눈앞에 두니 추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연락했느냐고요. 그는 바빴다고 얼버무리더군요. 별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요. 홀로 연정을 품은 저는 ‘을’이니까요. 저는 속으로 ‘그런 것은 다 됐다. 다시 만났으니 됐다.’라고 되뇌어 마음을 달랬습니다.
우리는 고속도로에 올랐습니다. 저는 목적지를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어련히 좋은 곳으로 데려가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곳이 아니더라도 괜찮았습니다. 장소가 어떻든 소망은 재현될 테니까. 온전히 맡겼습니다. J에게. 믿음이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을 달렸습니다. 도중에 휴게소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이면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변의가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멈춘 듯싶다가도 조금 뒤 J와 몸을 섞을 생각만 하면 아랫배가 간지러운 듯 아픈 듯했습니다. 얼마나 초조하던지. 매번 찾던 호텔로 향했으면 이런 고생은커녕 이미 절정에 허우적대고 있을 텐데,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건지. 또 굳이 이렇게 멀리 가는지. J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이 모순된 감정선이 재미있지 않나요? 자기를 온전히 맡길 정도로 그를 믿는다면서 동시에 원망한다니. 분명 두 감정은 어울리지 않습니다만, 원망도 믿음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원래 모순되지 않나요? 사랑이라는 것이 또 그렇고요. 아니, 애초에 인간이 그렇죠.
다행스럽게도 제 입에서 원망의 소리가 나오기 전에 차는 고속도로 나들목으로 향했습니다. 강원도 춘천이었습니다. 춘천 시내를 지나 외진 산길을 올랐습니다. J와 처음 만났던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외진 산길을 올랐었지요. 길 끝에는 호텔이 있었고요. 이번에도 호텔이나 리조트가 나오겠거니 했습니다만, 길 끝에 이르자 예상과 다르게 웬 별장이 보였습니다. 별장 앞 너른 주차장에는 J의 것과 같은 급의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J가 그 옆에 나란히 주차하고 시동을 껐습니다. 불 켜진 별장 안에서 새어 나오는 왁자지껄한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실망했습니다. J와 단둘이 아니라는 건 오늘 밤 성적인 행위가 없을 것이고 소망은 재현되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으니. 일반적으로 타인이 있는 곳에서 성적인 행위를 계획지는 않지요.
저는 말없이 조수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딴은 토라졌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차에서 내린 J는 조수석으로 와서 문을 열고 손을 건넸습니다. 그러는 그의 입꼬리가 솟아 있었습니다. 제가 표현을 너무 약하게 한 건지 아니면 그가 알고도 모른 체 하는 건지. 네, 그는 웃고 있었습니다.
‘을'은 항상 불리합니다. 사소한 표현 외엔 의견을 제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갑’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서 항상 겁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갑'인 J의 손을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려 이끄는 대로 따랐습니다. 별장이 가까워지자 J가 손을 놓고 앞서 걸어가 현관을 열고 닫히지 않게 잡았습니다. 저는 J를 지나쳐 별장 안으로 발을 들였습니다.
환호성이 일었습니다.
별장 안 남녀가 과장되게 손뼉을 치고 환호했습니다. ‘ㄷ’ 자로 놓인 소파에 둘러싸인 테이블 위에는 언뜻 보아도 귀해 보이는 술이 놓여 있었습니다. 고급스러운 음식들도 보였지만 거의 손을 대지 않았더군요. 저는 마지못해 인사를 하고 그들을 다시 찬찬히 보았습니다. 총 다섯 명으로 두 쌍의 남녀와 짝이 없는 남자 한 명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모두 중년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저보다 한참 어려 보였고요. 여자라기보단 소녀에 더 가까웠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성숙한 화장을 했고 복장 또한 그랬습니다만, 애티를 가리지는 못했습니다.
J가 제 등을 지긋이 밀었습니다. 짝이 없는 남자를 향해서. 여자의 직감이 제법이지요? 출발하기 전부터 J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짐작했잖아요.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저는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뒤로 물러났습니다. 노래방 도우미 취급을 받기는 싫었거든요.
아랫도리 장사를 하는 창녀인 주제에 노래방 도우미 취급은 받기 싫다는 게 웃긴다고요? 설명하겠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창녀입니다. 그러나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목적에 따라 급은 분명하게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제 목적은 여느 창녀들과 같이 돈이 아니라, 소망을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탐구심에서 비롯된 자주적인 결정이었다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조건 만남은 계획을 세워 일주일에 단 한 번만 했을뿐더러 낮에는 중견기업 사원 유하경으로서 맡은 임무를 충실하게 해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찾아낸 것이지요. J를. 따라서 이제는 몸을 팔아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만약 다른 남자에게 저를 인도하려는 J의 속내를 사전에 알았다면 저는 당연히 만남을 거절했을 겁니다.
… ….
아니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거절할 수 있었을는지. 그랬다면 J는 연락을 끊었을 것이고 저는 소망을 잃었다는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매달렸겠지요. 시간의 문제일 뿐 결과적으로 저는 J가 아닌, 다른 남자의 옆에 앉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애초 J가 다른 남자에게 제공할 목적으로 저를 만나왔다고 생각하니 배신감이 일었습니다. J에게 조건 만남은 제게 그렇듯,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남자들에게 공급할 상품을 물색하고 상품성을 평가하는 수단이요. 그동안 그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도 알 수 있었습니다. 수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소녀의 티를 벗지 못한 어린 여자와 서른을 앞둔 저를 두고 고르라 한다면 어느 남자라도 전자를 택할 테니까요. 물론, 취향이란 셀 수도 없을 만큼 그 종류가 많고 다양하기에 후자를 고르는 남자도 간혹 있을 것입니다. 별장 안 짝이 없는 남자가 후자를 고르는 군에 속했겠지요. 다시 말해 저는 J의 상품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주력 상품도 아닌, 소수의 취향을 위한 구색 상품이요. 그런 줄도 모르고 J를 절대자, 신, 메시아, 주님이라고 찬양하고 심지어 연정까지 품었던 것입니다.
저는 뒤로 돌아 J의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그를 쏘아 보았습니다. 별장의 분위기는 얼었습니다. 별장 안 남녀에게 비협조적인 제 행동은 예상 밖이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J는 웃고 있었습니다. 비웃는 듯한 그의 웃음에 울화가 치밀어 앞을 막지도 않는 그를 굳이 밀치고 밖으로 향했습니다. 한겨울 밤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초행인 산길을 홀로 내려가야 한다는 걱정은 뒷전이었습니다. 별장 현관을 열고 문턱을 막 넘은 찰나, J가 제 손목을 잡았습니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돌았습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힘에 못 이겨 뒤로 돌았는지 아니면 잡아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는지.
J는 주먹 쥔 손을 내밀었습니다. 빙긋 솟은 입꼬리를 보던 시선을 그의 손으로 옮겼습니다. J가 서서히 주먹 쥔 손을 펴자, 작고 투명한 비닐 주머니에 든 하얀 가루가 보였습니다. 크리스털 결정 같았습니다. 실물은 처음 보았지만, 뭔지는 바로 알아챘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뉴스에서 본 적이 있었거든요. 각성제였습니다.
저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습니다. 다리 사이에서 팬티와 스타킹을 스미고 나온 따뜻한 액체가 현관 계단참에 고였다가 이내 계단을 적시며 아래로 흘렀습니다. 마당에 난 물길에선 김이 올랐습니다.
과잉 반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 한 번도 몸에 주삿바늘을 갖다 댄 적이 없었으니까. 따라서 각성제를 투약한 적도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기억을 되짚었습니다. 이내 경구 투여로 사람을 마약에 중독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이 당시 저는 J를 만나고 재현된 기형적인 쾌감을, 그것만큼 기형적인 우리들의 속궁합 덕이라고 치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쾌감이 각성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호텔에서 마셨던 물과 술 따위에 각성제가 녹아 있었다면?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투여량은 아주 소량이었을 것입니다. 마셨던 물과 술에서 다른 맛은 느낄 수 없었으니까요. 투약 횟수 또한 J와 만난 횟수가 다섯 번이고 그 다섯 번 모두 절정을 느꼈으니 말인즉, 고작해야 다섯 번입니다. 고작 다섯 번, 그것도 아주 소량을 투여했을 텐데, 각성제의 실물을 본 것만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오줌을 지릴 정도로 중독이 된다고요? 겪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짝이 없는 남자가 J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 치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J가 주저앉은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영리한 사람입니다. 그는 손을 건네는 사소한 행동만으로 선택권을 제게 넘기고,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을 덜어낸 것입니다. 그 손을 잡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별장 안에 발을 들이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손에 의지해 일어났습니다. 알면서도 거절할 수 없는 처지가 서러웠던지 눈물이 흘렀습니다.
J에게 이끌려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별장 안 남녀는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짝이 없는 남자가 다가와 J에게서 저를 인도받아 소파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저를 소파에 앉히고 옆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러고는 제 어깨 위에 팔을 두르고 끊임없이 뭐라 속삭였습니다만, 들리지 않았습니다. 온 신경이 테이블 위에 향해 있었거든요. 테이블 위에 있던 손대지 않은 음식들과 술이 반쯤 남은 술병은 한 편에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놓였던 자리에는 주사기와 각성제, 식염수 병이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기형적인 쾌감의 정체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비밀스러운, 초월적인, 신성한 것이 아닌, 고작 결정 몇 알이었다는 사실에 맥이 빠지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생각은 아주 잠깐,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찰나의 순간을 스쳤을 뿐입니다. 제 맞은편에는 여자 중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이미 투약했는지 앉았다기보다는 마치 녹아내리는 것처럼 축 처져 있었습니다. 그녀의 옆에서 각성제를 다루는 남자가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J를 처음 만났던 크리스마스이브. 그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읽은 마약을 다룬 기사 속 피해 여성들을 저는 비웃었습니다. 투약 한 번만에 중독됐다고 각성제의 무자비함을 호소하는 그들을 연민할 것이 아니라 최초 한 번의 투약은 그 자신들의 선택이었을 테니 멍청함을 꼬집고 돌을 던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또 그들을 더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것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는 너무나 쉽게 각성제를 다루는 남자에게 팔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글쎄요, 내어주었다는 표현보다는 팔에 묶인 실을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팔이 멋대로 앞으로 나아갔다고 적는 것이 맞겠습니다.
남자는 제 팔목을 쥐고 자기 쪽으로 당기더니, 반대 손에 든 주사기로 팔오금에 드러난 핏줄을 겨누어 찔렀습니다. 남자가 엄지로 밀대를 밀자 그 안에 담긴 각성제를 머금은 식염수의 양이 조금씩 줄었습니다. 이내 주삿바늘이 빠져나가고 남자가 잡고 있던 제 손목을 놓았습니다. 소파의 등받이가 등에 닿았습니다.
전과 같이 조명의 빛이 덮치듯 달려드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J와 호텔에서 겪었던 것보다 그 색은 더 찬란했습니다.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오감이 예민해졌습니다. 몸속에서 혈관을 달리는 피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피는 신체의 말단까지 퍼졌다가 몸의 중심으로 빠르게 모여들고 또다시 퍼져 나갔습니다. 호흡이 가빴습니다. 숨을 제대로 쉬려고 해봤지만, 목에서는 컥컥 하는 소리만 났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커지고 또 느려졌습니다. 그 또한 도저히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믿지도 않는 주님을 찾아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찾는 부르짖음은 겨우 살아있을 만큼만 들고 나가는 숨소리에 묻혀 몸 안에서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다음은 예상하고 계신대로 정해진 수순을 밟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여자들은 남자들에 의해 나체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일행 모두가 한 침대 위에 있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몸을 섞었습니다. 각자의 짝끼리 시작된 섹스는 이내 누구를 가리지 않게 되었고 그 후에는 두 명, 또 세 명의 남자가 동시에 한 여자를 희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의 앞과 뒤, 위와 아래를 가리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