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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우 Oct 25. 2024

3. 두 번째 편지 (2)


창문을 가린 블라인드의 틈을 비집고 드는 햇빛에 눈을 떴습니다. 저는 침대 위에 홀로 남아있었습니다. 지난밤이 의심스러웠습니다. 꿈이었을까? 이내 갈색과 붉은색 얼룩으로 엉망이 된 침대보가 눈에 들었습니다. 꿈이 아니었습니다. 침대보를 물들인 그것들의 정체를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습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니 하체에 묵직한 뻐근함이 느껴졌습니다. 뻐근함 또한 지난밤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였습니다. 이불로 몸을 감싸고 방을 나섰습니다. 그제야 제가 있는 곳이 별장의 이 층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침대까지 이른 기억이 없었거든요. 

일 층으로 내려오니 지난밤 남자들에게 벗겨졌을 옷이 소파 위와 그 주변에 늘어져 있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손대지 않은 음식들과 술이 반쯤 남은 술병이 지난밤과 모습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주사기와 각성제, 식염수 병이 놓였던 자리에는 현금과 벨라라고 적힌 쪽지가 놓여 있었는데 J가 지불했던 금액보다 액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투약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팬티를 집었는데 축축했습니다. 지난밤, 소변을 지렸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 상태로 씻지도 않고 밤이 새도록 몸을 섞은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비위 좋은 남자들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닥에 커피색 스타킹이 있었습니다. 스타킹을 신은 여자는 저 하나였으니 제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또한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축축한 팬티를 입었습니다. 스타킹은 그대로 두고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별장을 나섰습니다.

드러난 맨다리가 어찌나 시리던지. 칼바람을 견디며 시내로 이어지는 산길을 걸어 내려갔습니다. 다행히 산길은, 지난밤 J의 세단을 타고 오를 때 느낀 것과는 다르게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다만,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탓에 내려가는 중에 몇 번이나 발목을 접질릴 뻔했습니다. 큰길에 도달해서 휴대전화로 택시를 불렀습니다. 택시를 타고 서울에 있는 오피스텔로 향했습니다. 오피스텔에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날은 몽롱한 상태로 보냈습니다. 식욕도 없어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아침까지 이어진 몽롱한 상태는 오후가 되어서야 가셨습니다. 다음은 불안이었습니다. J의 연락이 끊길까 봐 불안해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이미 연락이 왔는데 알림을 못 들은 건 아닌지, 구형 휴대전화를 들고 수시로 화장실을 오가며 메신저를 확인했습니다. 답장이 늦은 사이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건 아닐까 싶어서 화장실로 향하는 걸음이 급했습니다. 그러는 것으로도 부족해 괜한 소문을 만들까 봐 가방 속에 숨겨둔 구형 휴대전화를 이제는 아예 책상 위 한쪽에 내놓고, 대놓고 확인했습니다.

퇴근하고 나서도 수시로 메신저를 확인했습니다. J의 메시지가 도착했음에도 구형 휴대전화의 어떠한 오류로 인해 알림이 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을까 봐서요. 불안 탓에 뭐 하나를 원만히 해내기가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눕자 불안 떨던 것이 거짓말처럼 바로 잠에 들었습니다. 

다시 밝은 아침, 잠에서 깨어 구형 휴대전화의 텅 빈 알림창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그래도 수요일까진 아직 하루가 남았으니 기다려보자고 생각하며 저 자신을 안심시켰습니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 몸을 일으키기가 버거웠습니다. 어제 퇴근하자마자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단 몇 분 정도 메신저를 감시하다 잠에 들었으니 수면 시간은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더 할 수 없는 정도로 나른했습니다. 이때부터였습니다. 정신과 몸 모두가 이미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


J의 호출이 있을 수요일이 되자 불안은 극에 달했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오전을 보냈습니다. 초조해하며, 꾸역꾸역. 

일요일부터 제대로 한 끼를 먹은 적이 없으니 뭐라도 먹어야 했습니다. J의 메시지를 받더라도 살아있어야 의미가 있을 테니까. 잃은 식욕은 음식을 앞에 두니 무섭게 돋더군요. 주문한 것을 다 먹고도 모자라 추가로 주문한 것까지 깨끗하게 먹어 치웠습니다. 그러고도 충족이 되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그만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점심을 욱여넣고 돌아오는 길에는 커피를 한 잔 샀습니다. 오후에는 부러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했습니다. 언젠가 들었던, 큰일을 앞두고 있을 때 초조해하거나 호들갑을 떨면 될 일도 안 된다는 말이 신경 쓰였거든요. 저는 J로부터 곧 메시지가 올 거라고 아니, 이미 메시지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초연하게 행동했습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저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상 중앙에 구형 휴대전화를 두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습니다. 이내 화면에 불이 들어왔고요. J였습니다. 저는 휴대전화를 들고 화장실로 달렸습니다. 변의를 참을 수가 없어서. 양변기에 앉아 쏟아 내면서 메시지를 확인했습니다. 메시지 내용은 지난주에 받은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긍정의 답장을 하고 밑을 닦았습니다. 일어나서 내려다본 변기 안에는 조금도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보였습니다.


참기 힘든 졸음, 더 할 수 없는 정도의 나른함 그리고 폭식과 설사의 반복. 그것들을 견디고 맞은 토요일, J를 만났습니다. 오피스텔을 나서기 전에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별장으로 갈 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돌아올 때 신을 운동화를 따로 챙길지 아니면 굽이 낮은 구두를 신을지. 결국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명품 가방 안에는 운동화가 들어가지 않았고 그렇다고 다른 가방에 운동화를 챙겨 가는 것은 번거롭게 느껴졌거든요. J는 강원도를 향해 차를 몰았습니다. 별장에 도착해서 그는 저를 내려 주고 곧장 떠났습니다. 별장 안에 들어서니 모임의 일행들은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지난주, 첫 방문 때와 같은 환호성은 없었습니다. 제 짝이었던 남자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아줄 뿐이었습니다. 

남자의 옆에 앉으니 맞은편에 앉은 각성제를 다루는 남자가 술병을 들었습니다. 저는 앞에 놓인 잔을 들어,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습니다. 제 짝인 남자가 각성제를 다루는 남자가 든 술병을 가리키며, “저거, 라벨. 진짜 금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빨리 투약하고 싶어 초조한 마음이 드러날까 봐, 가벼운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술이 든 잔을 손에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짝인 남자와 각성제를 다루는 남자를 제외한 모두가 초면이었습니다. 철딱서니 없게도 저는 지난주 모임에 참석했던 여자 중 다시 선택받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는 승리감이 일었습니다. 승리감에 도취해 술을 머금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 귀한 술의 맛과 향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럴 만도 합니다. 소망 재현을 눈앞에 두고 그따위가 문제였으려고요. 별장에 모인 일행들에게는 전채 요리였을 술자리가 그 당시 제게는 진심으로 고역이었습니다. 이미 별장에 있으면서도 ‘혹시나 술자리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겠지?’하는 불안이 일어 초조했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요.

한동안 이어진 술자리는 맞은편에 앉은 각성제를 다루는 남자가 자기 잔에 얼마 남지 않은 술을 한 번에 들이키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는 막 비운 잔을 테이블 위에 조금 세게 내려놓고 ‘슬슬 시작하죠?’라고 말했습니다. 남자의 한마디가 얼마나 반갑던지, 아래에서 시작된 찌릿하는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랐습니다. 일행들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켰습니다. 저도 눈치껏 일행들을 따랐습니다.

테이블 위에 투약을 위한 주사기와 식염수, 가장 중요한 각성제가 준비되었습니다. 한 주 동안 그려 마지않던 순간을 앞에 두자 놀랍게도 소변이 마려웠습니다. 투약을 기다리는 중에 용변 따위로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화장실에 간 사이 순서를 지나칠까 봐 불안하기도 했고요. 누구라도 각성제를 앞에 두면 저와 같이 생각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오피스텔에서 나오기 전에, 만약을 위해 여벌의 속옷을 챙겼습니다. 그러한들 지난주와 같은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소변을 참았습니다. 

여자들부터 순서대로 투약이 시작되었습니다. 투약이 끝난 후 일행 모두는 나체가 되었고 그날은 침대가 있는 이 층이 아닌 그 자리에서 바로 상스러운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짝끼리 시작된 관계는 이윽고 누구를 가리지 않고 번갈아 가며 이루어졌고 그다음에는 다수의 남자가 한 명의 여자를 희롱했습니다. 남자들이 그러는 동안 짝 잃은 여자들은 서로를 희롱했습니다. 제 짝인 남자와 각성제를 다루는 남자가 아닌, 나머지 한 명의 남자는 가학적인 성적 취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관계 중에 그의 아래 깔린 여자의 볼기와 아랫배, 신체의 어디를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구타했고 목을 조르기도 했습니다. 여자 중 누구도 그의 구타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가학적인 행위를 더 해달라고 사정하는 여자도 있었습니다.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또한 저 역시. 취재 당시 보셨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목에 난 상처가 바로 그의 손에 의한 것입니다.


다음날 잠에서 깨서는 몽롱한 상태를 굳이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천장이나 창을 가리고 있는 블라인드 따위를, 정확히는 눈을 떴을 때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모든 인기척이 사라지면 가장 마지막으로 옷을 챙겨 입고 별장을 나섰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불안에 젖어서 또 잠에 취해서 살았습니다. 호출은 매주 수요일에 J를 통해서 왔습니다. 그의 메시지를 받은 후엔 폭식과 설사를 견디며 토요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몇 주간 별장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제 짝인 남자와 각성제를 다루는 남자도 항상 참석했습니다만, 나머지 일행들은 매번 바뀌었습니다. 남자 중엔 초면인 사람도 있었고 구면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매번 초면이었습니다.

다음 모임 예정일은 4월 1일. 만우절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3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었습니다. 이쯤 돼서는 선택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이 많이 잦아들었습니다. 매주 호출받았으니까요. 다만, 월요일이 되면 토요일까지 닷새나 더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저 막막했을 따름입니다. 

불행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고 했던가요? 3월 마지막 주 수요일, J의 메시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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