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우 Oct 25. 2024

14. 2년 전. (2)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블라우스의 겨드랑이는 마르지 않았다. 긴장하는 중에 지하철 히터까지 쐰 스타킹은 블라우스보다 상태가 더 했다. 옷을 벗어 던지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를 묶고 몸에만 물을 뿌린 후 비누칠했다. 전례 없이 빠르게 끝낸 샤워 후에는 마스크에 쓸려 번지고 지워진 화장을 고쳤다. 휴대전화로 택시를 불러 두고 만약을 대비해 활동이 편한 청바지와 무지 반소매, 그 위에는 카디건을 걸쳤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도착한 택시 기사의 채근일 것이었다. 하경은 입사 후 좀처럼 신을 일이 없었던 운동화를 꺼내 신고 새 마스크를 챙겨 밖으로 향했다.

구매자가 보내 준 주소를 따라 도착한 곳은 유흥가의 모텔촌이었다. 모텔촌 안쪽까지 하경을 모시려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한 택시를 길가에 세웠다. 택시에서 내린 하경은 휴대전화의 안내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시야에 모텔 간판이 들었다. 외관은 멀리서 보아도 주변 건물 중 가장 허름했다. 약속 시간은 삼십 분 뒤였다. 무리해서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이제 구매자가 모텔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다가 그의 인상착의를 보고 결정하면 된다. 하경은 구매자에게 ‘저 도착했어요. 도착하시면 모텔 앞에서 연락 주세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몇 초 뒤 휴대전화 알림이 울렸다.

-일찍 오셨네요? 저 들어와 있습니다. 301호요.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막막해진 하경은 그저 멀뚱히 모텔을 바라보았다. 메시지를 읽고 아무 답장도 모습도 보이지 않는 하경이 구매자는 못내 답답하고 미덥지 못했는지 메신저의 통화 기능을 이용해 전화를 걸어왔다. 하경은 용서를 구하고 거래를 무를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 뭐예요! 사기예요?

걸걸한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저, 진짜 죄송한데 혹시 환불해 드려도 될까 싶어서요. 아까 입금해 주신 계좌로…”

대소하는 구매자. 하경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구매자는 숨넘어갈 듯 꺽꺽대며 웃었다. 한동안 웃던 구매자는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조건 처음이세요? 

구매자는 ‘음!’하고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이어 말했다. 

-무서워서 그런 거면 일단 들어오세요. 내 오만 원 더 드릴게.

그의 웃음소리가 멀어지며 전화가 끊겼다. 하경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숨을 내쉬자 입김이 마스크를 뚫고 저 멀리 모텔까지 닿을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마음을 먹고 모텔에 들어섰을 때 마주한 그 살풍경함에 조금이나마 진정됐던 마음이 다시 어수선해졌다. 301호 문을 두드리자 깡마른 몸에 모텔 가운을 두른 중년 남자가 문을 열었다. 하경은 쭈뼛대며 안으로 들어섰다. 외관만큼이나 오래된 방이었다. 하경은 씻고 오겠다고 말하고 화장실을 향해 돌아섰다. 이미 가운을 벗어 던진 알몸의 중년 남자는 하경을 막아서더니 바로 시작하자고 재촉했다. 발가벗은 남자의 배가 깡마른 다른 곳과 달리 올챙이 배처럼 볼록했다. 그의 아랫도리는 이미 잔뜩 발기되어 거무죽죽한 얼굴을 하경에게 들이밀고 있었다. 고놈의 주둥이는 뱉어낸 액으로 벌써 번들거렸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하경에게 건넸다. 말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이런 아저씨에게까지 화장을 고쳐가며 예뻐 보일 필요도 느끼지 못했기에 하경은 단념했다. 하경은 돈을 받아 가방에 넣고 마스크와 바지를 벗었다.

출발 전 하경이 우려했던 납치, 감금, 폭행 따위의 강력 범죄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외의 문제가 있었다. 하경의 아랫도리가 김 대리에게 당했을 때처럼 메마른 채로 젖지 않았다. 

“장사한다는 사람이 도구도 안 챙겨오고 뭐 하자는 거야?” 

남자가 하경을 타박했다. 그는 모텔에서 제공했을 일회용 윤활제를 가져와 하경의 앞에서 뜯었다. 하경은 그의 손에서 윤활제를 낚아채 직접 성기에 발랐다. 남자는 하경의 안에 물건을 집어넣고 앞뒤로 한 몇 번 움직이는가 싶더니 사정감 때문인지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하경의 위에서 멈춰있는 동안 그의 볼록한 배가 하경의 배에 닿았다. 다행히 하경이 입고 있던 티셔츠가 맞닿은 배 사이에서 경계가 되어 그나마 참을 수 있었다. 맨살끼리 닿았더라면 소름이 끼쳐 견디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다시 앞뒤로 허리를 몇 번 더 흔들더니 앓는 소리를 내며 하경의 옆에 고꾸라졌다. 하경은 침대 옆에 놓인 휴지 곽에서 휴지 몇 장을 뽑아 성기에 묻은 윤활제를 닦아 내고 옷을 입었다. 남자는 모텔을 나서는 하경에게 침대에 누운 채로 ‘또 봐요.’라고 성의 없는 배웅을 했다. 하경은 대꾸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모텔촌 앞에서는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큰길로 나왔다.


집에 돌아온 시간은 10시가 조금 넘었다. 들어오자마자 하경은 첫 구매자가 건넨 현금을 꺼내 세었다. 모텔촌이 가까운 길에서 혹은 택시 안에서 현금다발을 세는 것은 ‘맞아요, 저 조건 만남 하는 여자예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참았다. 기본금 십삼만 원에 추가로 지불하겠다던 오만 원까지 십팔만 원이어야 하는데 구매자가 건넨 현금은 일만 원권 열 장이었다. 미리 받은 선입금 오만 원을 포함해도 삼만 원이 비었다. 

양아치 새끼가 따로 없네.

탄식했다. 하경은 ‘현금은 받은 직후, 꼭 세어 보고 넣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점심 이후로 내내 비어있던 속을 컵라면으로 채우고 샤워를 마쳤다. 자리에 누운 하경은 인터넷으로 윤활제를 구매했다. 용량별 비용은 큰 쪽이 더 저렴했으나 휴대해야 했기에 비싸더라도 작은 쪽을 택했다. SNS에 접속해 새로 달린 댓글을 읽었다. 한 단어만이 달랑 적힌 댓글이 눈에 띄었다. 하경은 그 단어를 검색했다.

목석 - 성행위에 반응이 없거나 전혀 즐기지 않는 여자를 비하하는 인터넷 용어.

오늘 상대한 구매자임이 분명했다. 그를 향해 다시 한번 상스러운 욕설을 읊조렸다. 댓글은 삭제했다.


처음이 가장 어렵다는 그 말대로 하경의 장사에는 탄력이 붙었다. 목석이라는 비난을 다시 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흥분한 연기를 했다. 조건 만남을 거듭할수록 연기는 능숙해졌다. 나름의 원칙들도 생겼다. 첫째로 한 번 만남을 가진 구매자와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본명과 계좌번호 심지어 얼굴이며 가장 은밀한 곳까지 아는 이와 다시 만나 몸을 섞는 행위가 처음 만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할 때와는 다르게 꺼림칙했다.

둘째로 성병 검사 확인서를 요구하는 구매자와는 만나지 않았다. 처음 구매자로부터 성병 검사 확인서를 요구받았을 때를 시작으로 하경도 성병 감염을 우려했다. 하경은 곧장 보건소를 찾았다. 그러나 모든 의료진이 코로나 감염 여부 검사에 투입되었다는 이유로 진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인근 개인 병원들에 문의했으나 성병 검사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따지고 고르는 과정들이 번거로워 그만두었다. 성병 검사 확인서를 요구하는 구매자들이 아니더라도 하경의 아랫도리는 항시 문전성시를 이루었기에 그들과 만남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지는 않았다. 문제는 속에서 싹이 튼 성병 감염에 대한 우려를 어떻게 떨쳐내느냐는 것이었다. 생각 외로 별 노력 없이 떨쳐 낼 수 있었다. 조건 만남은 아래만 알몸이 된 하경이 다리를 벌려 윤활제를 바른 성기를 내어주는 것으로 시작되어 구매자가 콘돔을 씌운 성기를 하경의 몸 안에 몇 번 넣었다 빼는 것으로 싱겁게 끝났다. 요는 그 과정에서 연인들이 섹스 중에 흔히 즐기는 키스나 애무 따위의 살이 닿는 스킨십이 일절 없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그런 행위들 하나하나가 모두 개별적인 옵션으로 통했고 하경은 어떤 옵션도 판매하지 않았으니까. 하경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김 대리 사건 후에 걸렸던 지독한 질염을 낫게 해준 질염 약을 구매해 찬장 깊숙이 보이지 않는 곳에 넣어 두었다. 마음이 한결 편했다.

마지막으로 콘돔은 직접 구매해서 지참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성매매 여성과 섹스할 때 부러 구멍 뚫은 콘돔을 사용한다는 이의 글을 보았다. 또 모텔에서 제공하는 콘돔은 모텔을 드나드는 연인들을 향한 질투심에 직원들이 구멍을 뚫어 두기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글도 보았다. 두 글에 모두 조작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인 주작이라는 댓글이 주를 이뤘지만, 신경이 쓰였다.

하경은 SNS 또한 엄격하게 관리했다. 구매자들의 후기는 자기의 외모와 매너를 칭찬하는 호평을 적은 것들만 남겨두었다. 메신저를 통해 개인적으로 받은 구매자들의 후기는 캡처한 후 긍정적인 부분만 적절히 편집해 올려 두었다. 틈틈이 나체 사진이나 구매자와 몸을 섞는 중 촬영한 영상을 올려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에는 입에 담지도 않았던 상스러운 말들을 SNS에 적어두었다. 하경은 주에 최소 세 번의 만남을 가졌고 그로 인해 한 주에 삼십구만 원, 한 달에 백오십육만 원의 월급 외 수입이 발생했다. 그대로 승승장구하는 듯싶었으나. 

이듬해 1월의 어느 금요일. 일감이 없어 눈치 보며 시간만 때우는 사원들이 영 마뜩잖았는지 퇴근 전까지 팀별로 세 건의 기획안을 제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때문에 하경은 회사에 발이 묶였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안다고 해도 이해해 줄 리 없는 구매자는 계속해서 예약 시간을 미루는 하경을 선입금 사기범으로 몰았고 끝내 하경의 신상을 인터넷에 퍼뜨리겠다는 협박을 해댔다. 퍼뜨려 봐야 계좌번호와 이름뿐일 테지만, 하경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지에 혹시라도 퍼졌을 자신의 신상을 찾아 헤매며 며칠을 끙끙 앓았다. 결과적으로 하경의 신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이 사건은 하경에게 각성의 기회가 되어 전보다 체계적으로 조건 만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경은 기존에 사용하던 휴대전화 번호를 변경하고 구형 휴대전화를 중고로 구입했다. 구형 휴대전화로 새로운 SNS를 개설했다. 기존 SNS는 폐쇄했다. 새로 지은 닉네임은 벨라. 소설 원작 영화 트와일라잇에서 뱀파이어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을 따왔다. 그녀에게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가 나타나 소망을 실현해 준 것처럼 자기에게도 쾌감을 재현해 줄 에드워드가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을 닉네임에 담았다.

새로 개설한 SNS의 소개 글도 다시 작성했다. 작성된 소개 글은 만남은 토요일에만 가능하다는 문구로 시작되었다. 당구장 표시로 강조도 해뒀다. 다음으로 가격을 손봤다. 주목적과 그저 덤으로 취급했던 돈의 우선 순서가 바뀐 것이 아님은 분명했으나 계좌에 쌓여가는 돈을 보았기 때문일까? 한 주에 세 번을 기본으로 하던 일이 한 번으로 줄어버린 만큼 수입도 삼분의 일로 줄 것이라는 사실이 탐탁지 않았다. 십삼만 원이던 기본금을 십오만 원으로 인상했다.

그래도 줄어든 수입이 못내 아쉬워 복장, 스타킹, 양말, 또는 구매자가 원하는 속옷을 입어 줄 수 있다는 문구를 적어두었다. 가격은 다른 판매자들의 소개 글을 참고했다. 착용할 때 품이 많이 드는 복장이나 속옷은 오만 원, 스타킹이나 양말과 같이 신고 벗기 간편한 것들은 삼만 원으로 책정했다.

마지막으로 선입금에 대한 언급을 삭제했다. 하경은 판매자가 선입금을 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선입금을 받는 판매자를 대놓고 사기꾼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입금을 요구하던 하경에게 조건 만남 의뢰가 끊이지 않았었던 걸 보면 구매자들 사고의 주체는 필시 머리가 아닌 성기일 것이라고 하경은 비웃었다.


원래도 소극적인 대인 관계 탓에 사적으로 어울릴 사람은 없었다. 딱히 돈이 드는 취미 생활을 즐기지도 않았다. 대학 때 좋아했던 옷은 관심이 식었다. 사 봐야 입을 일도 별로 없었다. 입사 후에는 정장풍의 옷을 입어야 했기에 그런 옷을 몇 벌 구비해 두고 돌려 입었다. 화장품도 매일 같은 화장을 하는 탓에 필요한 것만 구비해 두었다. 이제는 명품 가방 하나쯤은 지녀야 할 나이가 되지 않았냐는 여자 선임의 은근한 구박이 있었지만, 하경의 머릿속은 쾌감을 재현하기 위한 수단을 궁리하느라 바빴기에 소비 욕구는 일지 않았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소비라 하면 식비 그리고 술. 따라서 조건 만남을 시작하고 나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고스란히 계좌에 쌓였다. 선입금 사기범으로 몰리고 난 후에 조건 만남 횟수를 줄이면서 수입도 덩달아 줄었지만, 워낙 지출이 없다 보니 계좌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다가온 설에는 부모님께 두둑한 용돈을 전했다. 취업 준비를 할 땐 투덕거리기만 했었고 심지어 그전에는 머리칼을 주방 가위로 자르기도 했던 부모님이지만, 명절을 핑계 삼아 한 번쯤은 화목한 가정을 연출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세배하고 미리 챙긴 봉투를 직접 전달하는 정석적인 효도를 연출하고 싶었으나 정부의 집합 금지 명령이 여전히 유효했기에 고향인 천안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메신저로 송금했고 하경이 보낸 돈을 확인한 엄마는 곧장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웬 돈을 이렇게 많이 보냈냐며 유난을 떨었다. 휴대전화로 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돈의 출처 때문이었을까, 하경은 생각했던 만큼 기쁘지는 않았다. 

같은 달, 코로나 백신이 한국에 수입되었다. 백신을 옹호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이 충돌했다. 반대하는 입장을 지지하는 자 중에는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퍼뜨리는 이들도 있었다. 정부는 백신에 대해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이들을 엄벌하리라 엄포를 놓았고 백신 미접종자들에게는 불이익을 부여하며 접종을 유도했다. 그런 중에도 매주 토요일 하경의 장사는 성업을 이뤘다.

6월, 코로나 델타 변이가 등장하면서 4차 대유행이 시작되었고 서울시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최고 단계인 4단계로 격상했다.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으나 하경에게는 그리 와닿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은 코로나 투병의 고통은 잊힌 지 오래였고 벌써 몇 차례나 거리두기 단계가 오르고 내렸으며 수시로 세부 내용이 변경되었기에 숙지하기조차 어려웠다. 하경은 다만, 모텔이든 호텔이든 숙박업소만은 꾸준히 영업을 해주기를 바랐다.

9월, 하경의 또래들인 이삼십 대의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고 11월, 국민 전체의 80%가 백신 접종을 완료했다. 12월에는 코로나의 새로운 변이 형태인 오미크론이 등장했다. WHO와 정부는 변이할수록 치명률이 낮아지는 바이러스의 생리를 근거로 들며 새로운 변이 형태를 반갑게 맞았다.


이듬해. 

이미 오랜 시간 본가를 떠나 있었기 때문일까,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의 천안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결국 이번 설에도 하경은 본가를 찾지 않았다. 대신 전년도 설에 그랬듯이 용돈을 송금한 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몇 년째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돈으로만 때우려고 하냐며 하경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그에 하경은 아직 코로나의 기세가 완전히 꺾이지 않았으니 조금 더 잠잠해지면 얼굴을 비추겠다고 엄마를 달랬다.

4월에 들어서자 비로소 코로나의 기세가 확연히 꺾였다. 사회적 거리 두기도 중단되었다. 엄마와 한 약속대로라면 본가를 찾아야 마땅했지만, 귀찮음이 앞섰다. 곧 새 정부에게 자리를 내어줄 현 정부는 5월 2일부터 야외 마스크 착용을 의무에서 권고로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마스크를 착용하기 시작한 지 566일 만이었다. 그리고 도래한 5월 2일, 시민들은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그로부터 8일 뒤인 5월 10일에는 새 정부가 출범했다.

예년보다 이르게 찾아온 장마는 그칠 줄을 모르고 쏟아부었다. 덕분에 무더위는 제법 식었지만, 뉴스에 따르면 서울 곳곳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코로나의 기세가 꺾였음에도 건물이 침수되어 긴급 자택 근무를 시행하는 회사도 있었다. 역시나 하경의 회사는 출근을 고수했다.

장맛비가 그치고 하경은 회사에서 이십 분 떨어진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부모님에게는 함구했다. 오피스텔의 구조는 복층으로 보증금은 일억 원이 조금 넘고 월세는 백만 원보다 조금 적었다. 보증금에서 모자란 금액은 청년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시행된 국가사업의 일환인, 이자가 비교적 저렴한 대출로 충당했고 월세는 조건 만남으로 얻는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이왕 지출하는 김에 가방도 하나 구입했다. 가방을 구입한 날 이른 아침. 청담 사거리에 있는 백화점을 찾았다. 백화점이 개점하기 전에 도착했으나 벌써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도착한 후로 두 시간이 지나서야 매장 안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이백만 원이 넘는 가방은 광이 번쩍이는 검은색 바탕에 한가운데에는 작은 브랜드의 문장이 박혀있었다. 명품 가방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며 구박하던 여자 선임에게 보여줄 의도로 새로 산 가방을 들고 출근했으나 선임은 부러 그러는 것인지 정말로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하경에게 별말이 없었다. 이튿날 하경은 다시 원래 들고 다니던 가방을 들었다. 명품 가방은 크기에 비해 많이 담을 수 없기도 하거니와 괜히 흠집이라도 나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 옷장 안에 고이 모셔두었다. 괜한 지출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경조사가 있을 때 들 가방 하나 마련했다고 자기를 위로했다.


취직 후 본가를 떠나온 지 이 년이 넘었다. 홀로 지낸 시간도, 정확히 따지면 대학교에서 쫓겨난 후부터 줄곧 혼자였으니, 팔 년이 넘었다. 쾌감을 재현하기 위해 조건 만남을 시작한 지는 열 달. 근 일 년을 다 채웠으나 들인 노력과 시간이 무색하게 쾌감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시금 쾌감의 실재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하경은 모든 것에서 재미를 잃었다.

그렇다고 조건 만남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벌여 놓은 것들이 많았다. 명품 가방의 할부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매달 나가는 오피스텔 보증금 대출이자와 월세를 감당하려면 월급만으로는 벅찼다. 까짓 임대 계약이야 부동산을 통해 다른 세입자를 구한 후 중개비를 지불하는 정도로 손쉽게 철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문제는 이미 겪어버린 높은 삶의 질이었다. 걸을 때마다 뒤꿈치에 달라붙어 들썩이는 장판이 깔린 자취방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더 벌진 못하더라도 유지는 해야만 했다.

무기력증은 지출하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열심히 일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합리화는 지출을 촉진했다. 관심을 끊었던 옷을 다시 사들였다. 내친김에 몇십만 원짜리 드라이어도 샀다. 무기력증이 해소되는 기간은 지출하는 금액에 비례했다.

운동도 시작했다. 오피스텔 인근 헬스장에 작심하고 일 년 회원권을 등록했다. 그 일 년을 채우지 못한 이유는 탐구심 탓이라고 할까. 회원권을 등록하면 덤으로 따라오는 개인 P.T가 있었다. 하경을 담당한 트레이너는 각종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만큼 우람한 몸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우람한 몸을 마주했을 때 하경은 ‘이 남자는 어떨까?’하는 탐구심이 일었다.

트레이너에게 교제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하경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주 살짝 꾀어냈을 뿐인데 쉽게 넘어왔다. 

침대 위에서 마주한 그의 성기는 우람한 몸과 달랐다. 크기도 작은데 말도 듣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발기시키려는 그의 몸부림이 안쓰러워 하경은 대학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남자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앙증맞은 물건은 윤활제도 바르지 않은 하경의 안으로 별 노력도 없이 너무나 쉽게 들어왔다. 트레이너는 단 몇 번 허리를 흔들다가 이내 앓는 신음을 내며 쓰러졌다. 탐구심이 해소되었으니 모텔을 떠나야 마땅했다. 그러나 트레이너는 하경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덩치에 걸맞지 않은 앙증맞은 성기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몇 번이고 달려들었다. 하경은 말 그대로 목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딴은 티를 낸 것이지만, 트레이너는 눈치도 없었다. 

새벽 3시가 넘어서 모텔에서 나올 수 있었다. 트레이너가 코를 골기 시작하고 삼십 분 정도 더 그의 옆에 누워서 그가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에서 트레이너의 메신저 계정과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일이 있고 난 뒤로 헬스장은 출석하지 않았다. 결제한 회원권이 아까워 환불 절차를 알아보았으나 귀찮음이 앞서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며칠 뒤 회사에 있는 하경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트레이너였다. 왜 연락이 되지 않냐고 타박하는 그를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착신 기록을 열어 전화를 걸어온 휴대전화 번호를 차단했다. 트레이너는 집요했다. 몇 번이고 더 모르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왔고 심지어 누군가의 메신저 계정으로 하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모든 전화번호와 메신저 계정들을 차단하다가 지쳐 하경은 또 한 번 핸드폰 번호를 변경했다.


추석 연휴에는 상경 후 처음으로 본가를 찾았다. 

연휴 첫날, 상봉의 반가움은 찰나였다. 조건 만남을 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 죄책감과 배덕감 탓이었을까? 머물기가 영 찜찜했다. 추석 당일인 다음날 하경은 결국 버티지 못했다. 이른 아침 차례를 지내기도 전에 회사에서 급한 호출이 왔다고 둘러대고 집을 나섰다. 떠나는 하경의 뒤에서 서울 가는 기차표는 구했냐고 아빠가 물었다. 가면서 알아보면 된다고 하경은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천안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하경은 기차표를 검색했다. 다행히 늦은 오후에 서울로 향하는 기차표가 남아 있었다. 천안역사 내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기차 시간이 될 때까지 시간차를 두고 음료를 세 잔 주문했다.


연말에는 술자리와 회식이 끊이지 않았다. 사적인 술자리는 마다할 수 있었다. 늘 그래왔으니. 회식은 그럴 수 없었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참석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 반드시 참석하라는 명령으로 들렸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중견기업의 회식 문화가 중소기업인 태성 인터내셔널과 다르지 않았다. 가장 상급자의 옆에는 가장 어린 여자 사원들이 앉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옆으로 다음 상급자가 앉았고 또 그 옆에는 다음으로 어린 여자 사원들이 앉았다. 여자 사원들은 마치 영화에서나 봤던 술집 아가씨들처럼 상급자가 잔을 비우면 술을 따라 잔을 다시 채웠다.

남자 사원들은 이마가 남아나지를 않았다. 중간급 정도의 사원 한 명이 맥주를 반 정도 채운 글라스를 일렬로 세워두고 글라스 사이사이에 소주를 따른 소주잔을 올려 두면 남자 사원들은 낮은 직급부터 차례대로 회사인지, 상급자인지 모를 어딘가에 충성을 맹세하며 이마를 탁자에 박아 글라스 위의 소주잔을 쓰러뜨려야 했다. 소주잔 중 단 하나라도 글라스 위에 그대로 남아있거나 글라스 안이 아닌 다른 곳에 떨어지면 상급자들은 구박했다.

회식이 목요일로 고정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토요일에 예약된 조건 만남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으니까. 회식 다음 날인 금요일에는 오전 근무만 했다. 직급이 낮은 사원들은 강요당한 음주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 금요일 오전을 견뎠다. 

11월 마지막 주는 회식이 없었다. 그리고 12월에는 삼 주째 회식이 이어졌다.

12월 15일, 그날은 운이 좋았다. 오전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하경은 책상 아래 둔 가방 속 구형 휴대전화가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휴대전화를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알림의 정체는 구매자의 메시지였다. J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구매자는 스타킹을 신어주는 대가로 추가금 십만 원을 제시했다. 물론, 기본금 십오만 원과 별도로. 그는 다음 주 토요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조건 만남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이미 예약이 있었지만, 하경은 수락했다. 먼저 예약했던 다른 구매자에게는 개인 사정으로 조건 만남을 취소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퇴근해서 팀원들과 회식 장소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좋은 소식이 들렸다. 며칠 전부터 연말 승진 대상에 하경이 포함되어 있다는 소문이 사내에 돌았다.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한 달 전, 하경의 바로 윗선임은 코로나의 여파로 취업 시장이 마비된 상황에도 연봉을 올려 이직했다. 그가 회사를 떠나고 생긴 빈자리를 하경이 메우게 된 것이었다. 그 말은 막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연봉 상승보다 막내를 벗어났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팀장의 옆에 앉은 하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받으며 300cc 잔에 가득 채운 소맥을 단숨에 들이켰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하경은.

이제 인생이 좀 풀리려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전 13화 13. 2년 전.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