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by 비누방울

평범한 일요일 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밤.

그날 밤에 난 나를 만났다.

내가 나를 만나는 순간은 특별한 사건이,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서서히 무너지고 내가 나 자신과 점점 멀어지게 된 것처럼,

내가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은

평화로운 밤이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분리되었던 나와 다시 재결합하는 중요한 순간은

그렇게 아주 조용한 밤에 이뤄졌다.




내가 무너지던 것도 특별한 사건이 있던 게 아니다.

아주 느릿한 일상.

그 일상 속에서 나는 무너지고, 나 자신과 멀어지고 있었다.


나를 무너뜨린 건 사고가 아닌 일상이었다.




아마 여러 번 썼던 것 같지만 난 망상을 자주 한다.

그 망상 속에서 나는 슈퍼스타, 형사 등 온갖 해결사가 된다.

정작 일상 속 카드값은 해결 못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거울을 무서워한다. 내 모습을 자각하는 순간이 너무나도 힘들다.

그 느낌이 제일 싫다.

아, 싫었다.


그렇게 내가 나 스스로와 멀어진 건 자기 방어를 위한 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최근에 다른 생각이 하나 더 들었다.

미친 듯한 나의 소비, 야식 습관을 보면서 자기 방어, 긴장완화, 감정표출도 물론 작용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뒤를 생각하지 않는 무책임함 또한 있었다.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는데 그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

돈도 내가 책임 안 지고, 먹는 것도.. 내가 살이 쪄서 건강이 나빠져서 힘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일단 먹는다.

그렇게 나는 나의 마음이 매우 힘든 상태라 믿었다.


하지만 요즘의 평범한 일상과 사실 오래전에 끝난 불안을 생각하면

조금 이상했다.

야식과 과소비는 오래된 습관에 더 어울렸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오래된 습관에 머물고, 아프지 않은데 아직도 아프다고 외치고 있는 걸까.

자유를 바라고 누릴 수 있으면서 스스로 억압받는 다 믿고

책임지지 않으려 할까.

왜 인생의 안전선 안에 머무르려 할까.




자유는 책임을 동반한다.

어린 나는 자유롭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아이였다.

아이니까.


하지만 아무도 그 아이를 신경 쓰지 않는다.

"넌 혼자서도 잘하잖니"

"00 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좋아"

그 말들은 날 괜찮은 아이로 가둔다.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알아서 잘 헤쳐나가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점점 강해진다.


그 상태에서 겪은 성추행, 형제의 자살시도, 부모의 병 등...

버티기 힘든 모든 일에도 여전히 나는 겉으로 잘 지내려고 애쓴다.

내면은 터지기 일보직전인데 겉으로는 웃고 있다.

나는 걱정 끼치지 않는 딸이니까. 그런 역할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압박 속에서 자랐다.


집을 나가고 다시 돌아오고 등등의 일을 겪으면서 나는

사과를 기다렸다.

언젠가는 나의 부모가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 하며 먼저 사과해 주길,

어린 시절의 내가 사과받길 바랐다.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책임을 져 주길 바랐다.

이 마음이 참 오래갔다. 집을 나오고는 계속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사과를 바랐다.




그렇지만 이제는 안다.

그들은 잊었고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과거에 얽매이는 것,

그 상처에서 사과를 기다리는 것은

운행이 종료된 버스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것도 안다.


지난 10년은 그렇게 나의 아픔을 토로하는 시기였나 보다.

부모 돈도 막 써보고

내 몸도 망가뜨려보고

그렇게 어떻게든 악을 쓰던 때였던 거 같다.


그 시간들이 흐르고 평화로운 요즘

나는 옛 습관들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나를 위한 위로, 사과, 보상을 그만두고

안전선 밖으로 나와도 될 거 같다.

이미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삶은 대단한 사건들이 바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 사건 1보다, 작은 일상 99가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다.




유럽에서 교환학생하던 시절

귀국하기 한 달 전부터 나의 공황은 심해졌다.

집에 돌아가 부모를 만나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9월... 나의 부모와 그 유럽을 같이 간다.



인생은 모순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