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owa Jan 28. 2022

어느 날 갑자기

양쌤의 another story 5

  그녀가 나를 떠났다. 아주 오랫동안 ‘겉바속촉’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던 그녀가 떠나 버렸다. 내가 내밀은 빵을 조용히 거절하고는 말이다. 


  그동안 그녀는 잔병치레 한번 안 했더랬다. 그녀는 게으른 주인이 제때 치우지 않은 전투의 흔적들을 늘 몸 안에 품고 있었다. 한동안 멀티 플레이어인 O씨에게 밀려 눈칫밥을 먹은 적도 있을 거다. 본연의 임무를 절대 잊지 않았던 그녀의 성실함과 평범한 외모를 타박하던 심술궂은 주인 탓에 마음고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한결같이 내 곁을 지켰다.

  나는 미련 없이 그녀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마음을 먹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녀 앞에서 또 다른 그녀를 찾느라 쉴 새 없이 휴대폰 화면을 두드려댔다. 인정머리 없이. 그녀와 헤어지는 섭섭한 마음보다 새 식구를 맞을 기대가 더 컸다.

  며칠 후, 파스텔 핑크의 상큼한 그녀가 왔다. 예전의 그녀는 진열장 제일 아랫칸에 대충 밀어 넣곤 했더랬는데 이번엔 당당히 제일 위 명당자리에 데려다 놓았다. 새로운 그녀에겐 해동기능과 보온기능도 있다. 너무나 쉽게 덮개가 자리를 이탈해 쨍그랑 거리는 소리로 놀라게 하는 것만 빼면 완벽하다.

  냉동실에 쟁여둔 식빵 두 개를 바삭하게 구워 블루베리 잼을 듬뿍 발라 에티오피아 원두를 내려 함께 먹는 아침은 너무 행복하다. 아, 나는 너무 빨리 예전의 그녀를 잊어가고 있다.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 한마디 없이 이별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안방의 열린 문틈으로 그가 보인다. 그녀와 P사 동기로 함께 나에게로 와서 이제는 혼자가 된 그다. 최고참인 그는 아직 나를 떠날 계획이 없는 것 같다. ‘스뎅’으로 된 세모난 얼굴에 제법 잡티도 앉았구만 여전히 뜨겁고 씩씩하다. 그가 떠나는 날은 아마 매주 그와 만남을 가지며 정이 들었을 남편이 나보다 섭섭할 듯하다. 뜨겁고 반듯하기 그지없는 성정으로 남편의 셔츠들을 단속해 왔으니 말이다.

  집안을 쓱 둘러보니 여기저기서 일꾼들이 앓는 소리를 한다. 불꽃을 품기엔, 시도 때도 없이 컬러풀한 모습을 보여주기엔, 남의 몸 데워주기엔 이제 지쳤단다. 10년 근속상을 받고도 쌩쌩하게 찬바람을 뿜어내고, 얼음 덩어리를 뱉어내고, 열심히 빨래를 하는 이들도 있으니 아직은 열심히 할 때라고 격려를 해 보았다. 하지만 조만간 단체 파업 혹은 폐업에 들어갈 듯하다. 분명 이들의 전 소속사에게 연락해 보았자 그냥 보내주라 할 가능성이 크다. 치료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말이다. 갈 때 가더라도 모두 함께 떠나는 건 아니지. 조금 더 힘을 내어주길 바래본다. 때가 되면 쉬게 해 줄 테니.    


  가끔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와 헤어진 다음 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가 연결되어 있던 멀티탭이 접촉 불량이었다. 나는 너무 성급히 그녀를 떠나보낸 것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병풍이 될 순 없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